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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 한편 을사오조약 늑결 이후 항일전을 재개한 의병은,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 의거를 빌미로 일제가 대한식민지화를 단행하기 위하여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한국군 을 강제 해산하게 되자 이들 일련의 침략사건들을 계기로 국망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전 국 규모의 강력한 대일 전면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1907년 이후 의병전쟁 이 전국적으로 격화⦁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자, 일제는 대한식민지화를 단행하기 위 한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의병 탄압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결국 의병전쟁은 1909년을 전후한 일제 군경의 대탄압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 그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말 의병사에서 양평지역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첫째는 지리상, 교통상의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양평은 동남쪽으로 원주로 연결되어 있으 며, 이곳 원주에서는 다시 동쪽으로는 강원도로, 그리고 남쪽으로는 제천으로 연결되는 교통상의 要路에 해당된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여주-충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 게 볼 때, 양평은 서울에서 강원도와 충청도로 연결되는 중간 거점에 상당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의병의 활동과 파급도 이와 같은 경로를 따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양평지역의 의병은 주지하다시피 華西 李恒老(1792~1868)를 연원으로 하는 화서학파의 성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화서로부터 시작하여 重菴 金平黙-省 齋 柳重敎-毅菴 柳麟錫으로 연결되는 화서학파 嫡傳의 문하에서 양평의병을 주도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류인석을 필두로 하여 朱 庸奎⦁徐相烈⦁李弼熙⦁李春永⦁安承禹 등 화서학파 성원들이 양평지역 의병을 주도한 중심세력이었던 것이다. 화서학파는 한말 전국의 여러 성리학 문파 가운데서도 특히 강렬한 사상적⦁이념적 지향 성을 표방하고 있었다.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화서문파의 학문적 특성이 일제 침략이라는 절박한 시대상황에 직면하여 강렬한 항일투쟁의 이론적 근거와 정당성을 제시 해 주었다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제 여기서는 양평지역 의병의 이론적⦁명분적 정당성을 제공해 주고 그 사상적 배경이 된 화서학파의 尊華攘夷사상에 대해 살펴하고자 한다. 또한 한말 양평지역의 화서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의병투쟁을 비롯한 양평지역의 항일 투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錦溪 李根元의 생애와 사상의 전반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화서 사후 양평지역 화서학파의 수장격이었던 그의 문하에서 李奎顯⦁千洛龜⦁尹正學⦁ 申益均⦁申郵均⦁朴廷和 등 양평지역 의병활동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많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