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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 성장하여 지평 상석리(砥平 上石里)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에 게 수학하였다. 인물이 총명・수려할 뿐 아니라 성품이 정직하여 비록 청빈하였으나 부 모를 잘 봉양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있었으며,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또 글씨를 잘 썼다. 1895년 스승인 안승우가 제천(堤川)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의 종사(從事)로 활약하였으 며, 충주(忠州) 전투에는 병으로 참전하지 못하였지만, 병이 낫자 제천으로 가서 스승을 도와 맹렬히 싸웠다. 1896년 장기렴(張基濂)이 인솔한 관군과 접전하다가 스승 안승우가 적의 탄환에 맞아 사로잡히자 의진은 모두 흩어졌으나 홍사구만이 남아서 호위하였다. 안승우는 "나는 장 령(將領)으로 죽음을 면할 수 없으나, 네가 나와 같이 죽는 것은 무익하다. 속히 떠나서 후일을 기약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홍사구는 "종사가 되어서 주장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어찌 혼자만 살 수 있으며, 제자가 되어서 스승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어찌 혼자 만 살 수 있겠습니까. 친구 간에도 환란을 당하면 어버이가 계시다고 해서 피할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스승에게 이겠습니까" 하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안승우가 적에게 욕을 당하자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금수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충신, 역 적과 사람, 짐승의 구별은 알 것이다. 우리가 대의(大義)를 의지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인 데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며 몸을 돌리면서 막대 속에 감추어 두었던 칼을 빼어 급히 적을 내려쳤다. 당황한 관군들은 총을 쏠 겨를도 없이 총대로 어지러이 내려 쳐서 홍사구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에 불과하였다. 이때 안승우와 홍 사구의 최후를 목격한 관군들은 '지독하다', '무섭다'는 소리를 저도 모르게 연발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國民章)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972~974. 註ㆍ騎驢隋筆 33~35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