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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 의 일이었다. 13도연합의병 부대의 서울 공략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 주력부대는 속속 임진강 유역으로 집결하여 1907년 이래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던 조인환・권준(權俊)・왕 회종(王會鍾)・김진묵(金溱默)의병 부대와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곳으로 이동 합류 해 온 의병부대는 허위를 비롯하여 박종한(朴宗漢)・김수민(金秀敏民)・김응두(金應斗)・ 이은찬(李殷瓚) 의병 부대였다. 이들은 허위를 총대장으로 삼아 의병 부대를 재정비함으 로써 여기에 임진강 유역의 연합의병부대가 발족을 보게 되었다. 연합의병의 총대장이 된 허위는 그후 계속 임진강 유역의 연합의병부대를 지휘하면서, 군율(軍律)을 정하고, 군표(軍票)를 발행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군기(軍器)를 제조하게 하였다. 한편 연안 지방 민에게 납세를 명하고, 미곡 반출의 정지를 호소하여 군량 확보를 도모하였다. 1908년 4월에 또 13도의 의진(義陣)에 통문(通文)을 내어 다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 의 국내적 결속을 공고히 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해외로는 박사 경현수(慶賢秀)를 청국 혁명당(淸國革命黨)에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청하였다. 5월에 부하 박노천(朴魯天)・이기 학(李基學) 등으로 하여금 태황제의 복위・외교권 회수・통감부 철거 등의 30개 조에 달 하는 한국민의 기본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국내외의 외교 적・정치적 의병운동 선전뿐 아니라, 경기도를 돌면서 의병전쟁을 전개하여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이때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꼭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차마 왜적과 함께 살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즉, 의병전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감하면서 목숨을 던져 항쟁을 계속한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연천에 주둔하고 있 을 때, 이완용(李完用)이 사람을 보내어 외부대신(外部大臣)을 주겠다고 허위를 유인하였 다. 휘하의 군사들이 심부름 온 사람을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보낸 사람이 죽일 사람이 지, 온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 하며 되돌려 보냈다. 그 이튿날 밤 헌병 40명에 의해 포위당하여 끝내 체포되니 1908년 5월 천둥치고 비가 크게 내리는 날이었다. 얼마 후 서대문 감옥에 이송되었는데 일본인 명석소장(明石少將)이 허위의 경력・이력 그리고 충 군애국(忠君愛國)과 동양평화에 대한 탁월한 경륜, 한학과 역학에 대한 깊은 조예 등을 알고 모든 백성들의 사표라 해서 마음 속으로 공경하고 복종했다. 이때 명석(明石)과의 문답 중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 르짖는 것은 입뿐이오.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들이 앉 아서 볼 수가 없어서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의 의병을 일으킨 뜻은 단순한 화이관(華夷觀)에서가 아닌 것임은 이로써 명백해졌다고 하겠다. 명석이 그를 존 경하는 마음이 날로 커져 그의 생명을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9월 27일 교수 대에 올라 51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총대장 허위가 순국한 후에도 이곳 의병들은 더욱 고무되어 게릴라 항전을 보다 강력히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