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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 세상은 그를 초야(草野)에 묻혀두지를 않았다. 대신 신기선(申箕善)이 왕에게 "허위의 경 륜하는 것과 포부는 세상에서 관중(管中)과 제갈량(諸葛亮)이라 일컫사오니 불러서 쓰시 는 것이 바로 이때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아뢰어 1899년 3월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 을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왕의 부름을 받은 허위는 "벼슬하는 것은 나의 근본 뜻이 아니지만, 외적을 쓸어 없애지 않을 수가 없고, 국가를 회복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내 장차 시험하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관로에 들어선 그는 그 다음달에 성균관 박사가 되 고 1904년에는 주차일본공사 수원(駐箚日本公使 隨員),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정삼 품 통정대부(正三品 通政大夫), 평리원 수반 판사(平理院首班判事)를 거쳐 평리원 재판 장(平理院裁判長)이 되었다. 이어서 그해 8월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제수되자, 국 가의 폐단을 없애고 벼슬길을 맑게 할 것을 주장하는 다음의 시무10조를 건의하였다. 첫째 :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를 것. 둘째 : 군정(軍政)을 닦아서 불시의 변에 대비할 것. 셋째 : 철도를 증설하고, 전기를 시설하여 교통과 산업에 이바지할 것. 넷째 : 연탄을 사용하여 산림을 보호 양성할 것. 다섯째 : 건답(乾畓)에는 수차(水車)를 써서 물을 대도록 할 것. 여섯째 :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며, 또 육축(六畜)을 기르도록 힘쓸 것. 일곱째 : 해항세와 시장세를 날로 더하고 달로 증가시켜 장사꾼에게도 공평한 이익을 얻도록 할 것. 여덟째 : 우리나라 지폐의 폐단이 심하니 은행을 설치하여 금・은・동전을 다시 통용 시킬 것. 아홉째 : 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별하지 말 것. 열째 : 관직(官職)으로 공사를 행하고 실직(實職) 이외에는 차함(借啣)하는 일을 일체 없앨 것. 이상에서 미루어 보아 그는 다른 위정척사론자들과는 다른 개화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 다. 이로써 그가 처음에 관직에 발을 딛게 했던 바의 국권회복을 위한 방안을 건의했으 나, 이미 정부가 그의 시무안을 받아들일 단계에 이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소(疏) 를 올려 사직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10월에 이정소 의정관(釐正所議正官)이 되고 다음해 3월에는 비서원승(秘書院承)이 되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내한하자 나라의 형편은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