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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의병들은 이들을 습격하여 다시 수십 명을 쏘아 죽였다. 그 뒤 관군들이 전열을 가다듬 고 다시 의병을 공격해 왔으나 이때 전세는 기울어 있었다. 중군 김대락 등이 거느리던 청송의진 수십 명이 가세해 온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에 의병들은 관군을 추격하여 10 여 명을 추가로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남한산성 의병들은 감은리 승전의 주역이었 고, 그 가운데서도 선생은 교전 현장에서 의병장 김하락 등과 함께 시종일관 전투를 지 휘한 주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하락의 진중일기에는 수차에 걸쳐 벌어진 이 날의 전투상황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날 정오에 적병이 화목으로부터 안덕 뒤 강변에 이르러 즉시 우리 군사에게 공격을 가 해 오는데, 이때에 군중으로 하여금 포를 터뜨리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적은 전혀 분위기를 모르고 곧장 성황현에 이르렀다. 이제 곧 천보총 5정을 내어 일제히 포를 터뜨리니 적진의 전열이 무너지므로 이에 기를 휘두르며 크게 외치니 사방 복병이 한꺼번에 발동하여 적의 군사는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10여 명이 되자, 적병은 크게 혼란하여 앞산을 향해 도망치 는 것이었다. 포를 잘 쏘는 우리 군사 10여 명이 천보총을 가지고 뒤를 쫓아 총을 쏘아 수 십 명을 죽이니, 적이 마침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므로 드디어 퇴군하여 본진으로 돌아 와 점심을 먹으려 하는데, 적이 이때를 틈타 다시 반격하므로 곧 좌우로 하여금 일제히 포 를 쏘게 하였다. 감은리 승전 후 선생을 비롯한 남한산성 의병들은 의성의진의 주장 김상종의 건의를 받아들여 의성 방면으로 서행(西行)하여 금성산 자락에 있는 수정사(水淨寺, 금성면 소 재)로 이진하였다. 관군들은 의병을 이곳까지 추격해 왔고, 5월 20, 25일에 금성산, 비봉 산 일대에서 다시 양 진영 간에 일진일퇴 공방전이 벌어졌다. 기독교 수용 선생이 일제의 국권침탈에 격분하여 참여했던 의병 활동은 여기서 종료되었다. 의성 수정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이후 선생은 경주 방면으로 남하하는 김하락 등 동료 의병 들과 작별하고 5월 27일(음 4.15) 휘하 3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이천으로 돌아왔던 것 이다. 경기도와 경상도를 무대로 거의 반년 간에 걸쳐 전개한 의병항전은 이로써 종료되 었으며, 이후 선생은 종래 견지해 온 유학적 신념과 사고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이념과 방략에 따라 항일구국투쟁을 지속적으로 펼쳐가게 되는 것이다. 선생이 김하락 등 동료 의병들과 결별하게 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다음 두 가 지로 생각된다. 오랜 행군과 연전으로 인해 의병들의 전력이 급격히 떨어져 더 이상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