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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영남의병과 연합항전 선생은 남한산성에서 패배한 뒤 재기를 위해 잔여 의병 수습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신용희, 김태원 등의 동지들과 함께 전열을 가다듬은 선생은 연장자였던 김하락을 의병 장에 추대하여 영남지방을 향해 내려갔다. 그곳에서 인재를 모아 재기 항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4월 9일(음 2.27) 동지들과 함께 장도에 오른 선생은 여주를 지나 제천․ 단양․ 풍기․순 흥을 차례로 거쳐서 4월 20일경 드디어 영남의 본향 안동 지경에 이르렀다. 그동안 제 천에서는 류인석 의병장의 환대를 받았고, 순흥에서는 본가에 내려가 있던 동지 조성학 과 합세하기도 하였다. 안동 지경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류인석이 거느리던 제천의병의 한 분파인 서상렬(徐相烈) 부대로부터 연합 제의를 받아 예천에서 일시 조우하기도 하였 고, 봉정사에서 다시 만나 영남의병과의 연합항전 방략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후 선생은 5월 하순 의병투쟁을 종료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 달 동안 청송․ 의성 일대를 전전하면서 수차에 걸쳐 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가운데서 도 특히 청송 감은리(甘隱里)에서 치른 격전이 가장 큰 전투라 할 수 있다. 선생을 비롯 한 남한산성의병 100여 명은 경주 방면으로 남하하기 위해 의성․ 청송 지경으로 이동하 였는데, 5월 13일(음 4.1) 청송 화목(和目)에 이르러 의성에서 넘어온 의진과 만나고 또 청송의진과 합세함으로써 의성, 청송의진과 연합전선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감은리 전투는 5월 14일(음 4.2)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 뒷산 성황현(城隍峴)에서 벌어 졌다. 이 날 의병들은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 170명이 의병 탄압을 위해 청송 화목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비책 마련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신용희는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덕 뒤 상봉에 잠복하였고, 조성학은 2대의 군사로 성황현에 매복하였 으며, 김경성도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황 주산(主山)에 매복해 있었다. 이때 선생도 역시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덕 후방에 매복한 채 적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상종이 거느리던 의성의병은 앞선 전투의 피로 때문에 관망하고 있었고, 청송의진도 안덕 속곡(束谷)으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초기 전투는 선생을 비 롯한 남한산성 남하의병들이 거의 단독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관군은 이 날 정오 무렵 의병들이 매복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안덕을 향해 성황 현까지 행군해 왔다. 이때 의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자 당황한 관군은 일시에 전열 이 무너져 후퇴하였다. 이어 선생이 지휘하던 부대를 비롯해 사방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 이 이들을 추격해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전열이 흩어진 관군은 앞산을 향해 달아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