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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판 결 문 〔판결문 생략 ; 최대현 지사는 군(軍) 오위장 출신으로 1907년(정미년)에 56세로 기의(起 義)하여 경기도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1919년(기미년) 양평의 3.1운동을 주도하였음. 본 판결은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받은 것이므로 판결문 내용은 생략함〕 4-1. 묘지 등 관련조사자료 의 병 성 명최대현(崔大鉉) 비 고 묘의 소재지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441-1 지형도· 위 치도 참조 묘비제(墓碑題) 慶州崔公諱大鉉 配孺人廷安李氏 之墓 사진참조 묘비명(墓碑銘) 한말에는 의병장으로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였으며 3·1운동 때에는 양평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동아시 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 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 고 같은 해 8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 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乙 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식민 지화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 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 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 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최대현은 대한제국시기 오위장(五衛將)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 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 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江下面)사무소 앞에서 6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날인 4월 1일 양서면(楊西面) 도 곡리(陶谷里)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부근에서 집합한 2천 여 명과 함께 다시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