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page

35 속을 뚫는 듯하였다. 이윽고 달은 지고 저녁 10시경이 되자, 적은 한 가닥 길을 찾아서 몰래 도망하므로 좌우의 우리 군사는 밤새도록 뒤를 쫓아 광주 장항(獐項) 장터에 도착하였는데, 바로 5일 새벽이었다. 샛별은 빤짝이고 닭 우는 소리는 여기저기 들리는데, 위아래 행진(行 陣)에서는 포성이 끊이지 않았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이천수창의소 의병들은 백현전투에서 승리한 뒤 그 기세를 이어 패주하는 적을 광주 노루목[獐項] 장터까지 추격해 무기, 군량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한 뒤 돌아왔다. 더욱이 백현전투 승리 이후 1월 27일에는 고종으로부터 의병활동을 독려하 는 다음과 같은 애통조칙(哀痛詔勅)이 비밀리에 도착함으로써 의진의 사기는 더욱 고무되 기에 이르렀다. 왜적이 궁궐을 침범하여 사직의 안위가 조석에 임박하니 토적(討賊)에 진력하라. (중략) 김 병시(金炳始)로 삼남창의도지휘사(三南倡義都指揮使)를 삼고 계궁량(桂宮亮)을 목인관(木印 官)으로 하여 장차 목인을 내릴 것이다. 경기에는 순의군(殉義軍), 충청에는 충의군(忠義軍), 영남에는 장의군(仗義軍)으로 하여 팔도에 내려보내니 팔도 각 군은 일제히 거의(擧義)토록 하라. 그러나 민승천을 대장으로 하는 이천수창의소 의진은 얼마 뒤 서울에서 파견된 일본군 의 공격을 받아 패산하고 말았다. 2월 13일 일본군 200여 명이 이현(梨峴)에 주둔하고 있 던 의병을 공격해 왔다. 의병들은 적의 공격을 예상하고 요로에 군사들을 매복시키는 등 최선을 다해 저항하였으나, 혹한 속에서 강한 북서풍을 안고 싸우게 되어 전세가 차츰 불 리해졌다. 이때 이현 동쪽 입구를 지키고 있던 선생도 전력을 다해 저항하였으나, 불리한 전세를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중심인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재기를 기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생은 원주 방면으로 이동하여 재기를 모색하고 군사를 모았다. 김하락은 심상희(沈相 禧)가 이끄는 여주의진을 찾아가 재기 항전을 협의하였고, 대장 민승천은 죽산으로, 그리 고 조성학은 영남 방면으로 내려가 각기 재기 방략을 찾고 있었다. 원주 방면에서 수백 명의 군사를 모아온 선생을 비롯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던 민승천, 신용희, 전귀석, 김태원 등의 동지들은 2월 25일 광주 이현에 다시 모여 포군과 민병을 규합하여 재기 항전을 천명하였다. 이때 모인 의병 수는 포군 1천800명을 포함하여 2천 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때 개편된 의진의 편제와 담당 인물을 보면, 새로운 의병대 장에 박준영(朴準英)이 선임된 것을 비롯하여 선생은 중군장의 중책을 그대로 맡았으며, 여주대장 심상희, 군사겸 도지휘관(軍師兼都指揮) 김하락, 도소모(都召募) 전귀석, 선봉장 김태원, 좌익장 김귀성, 후군장 신용희, 우익장 김경성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