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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공훈록> 정봉준(鄭鳳俊) 미상, 이명 : 봉준(奉俊) 의병장으로 충청도・황해도・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일제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 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주권을 크게 제약하였다. 이후 1907년에 이르면 다 시 헤이그 특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한편 「정미7조 약(丁未七條約)」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 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국 각처의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의병을 다시 일으켜 무장투 쟁을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분투하였다. 정봉준은 반일 의병투쟁을 전개할 목적으 로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7년 8월 초 충주 노은면(老隱面)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같은 달 15일에는 괴산 칠성암 (七星岩)에서, 그리고 지평 삼산동(三山洞)에서 일본군 300여 명과 3일간 교전하였다. 특 히 충주군 목계(木溪)에서 일본군 10여명과 교전하여 2인을 사살하고, 말 5필 및 병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 충주 과현(果峴)에서 그는 40~5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황해도 토산 군(兎山郡) 황곡(黃谷)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의병진이 흩어지자 패잔병을 수습하여 원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정낙인(鄭樂寅)의 의진과 합진(合陣)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7년 음력 11월 경기도 양주(楊洲)에서 각도 의병진이 모여 13도창의 군을 형성할 때, 1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참여하여 관북창의대장이 되어 서울진공작 전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3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504~505. 註ㆍ騎驢隨筆(國史編纂委員會) 127面 ㆍ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40・41・518面 ㆍ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260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505~507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2輯 241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124・237・342面 (279). 정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