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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있어 이를 통해 선생이 수행한 항일전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에 거주하던 선생이 의병에 투신하게 되는 것은 단발령이 그 계기가 되었다. 단발 령 공포로 서울 도성의 인심이 극도로 흉흉해지고 항일 적개심이 일시에 솟구치게 되자, 선생도 이에 격분하여 김하락을 비롯하여 조성학(趙性學)․ 김태원(金泰元)․ 신용희(申龍 熙) 등의 우국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이천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선생을 비롯한 지사들은 단발령 공포 다음날인 11월 16일(음) 이른 아침에 한강을 건 넜고, 17일 이천에 들어갔다. 선생이 이천에 들어간 날이 곧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이 날 이후 정부에서는 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선생을 비롯한 지사들은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화포군(火砲軍) 도령장(都領將) 방춘식 (方春植)과 협의하여 포군(砲軍) 100여 명을 선발한 뒤 이들을 근간으로 인근 각지의 의 병 모집에 나섰다. 이때 선생은 양근(陽根)․ 지평 일대로 들어가 그 지역에서 300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또한 조성학은 광주, 김태원은 안성, 신용희는 음죽으로 파견되어 각 군(郡)에 소속된 포군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처럼 인근 각지에서 모집한 의 병들이 이천에 모여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라는 연합의진을 세웠던 것이다. 이천수창의소 중군장 이천수창의소 연합의진의 지휘부는 안성에서 온 민승천(閔承天)이 창의대장에 추대되었 고, 도지휘(都指揮) 김하락, 도총(都總) 조성학, 좌군장 김귀성(金龜性), 우군장 신용희, 선 봉장 김태원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때 선생은 의진 내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인 중군장 을 맡게 되었다. 이후 의진의 편제는 몇 차례 바뀌었지만, 선생의 중군장 소임은 한결같 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처럼 의병전선에 참여한 선생은 1896년 1월 18일(음 1895년 12월 4일) 백현(魄峴; 이천 널고개)에서 일본군 100명을 상대로 첫 전투를 벌여 승리하게 된다. 매복 기습전으 로 압승을 거두었던 이 날의 전투상황에 대해 김하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당시 의병 의 의기충천하던 기세를 짐작하게 한다. (전략) 적병이 고함을 치며 뒤를 따라 쫓아와 백현 아래에 당도하였다. 그때 문득 대포소리 가 울리며 구연영은 전면을 가로막고, 김귀성․신용희는 산 중턱으로부터 쏜살같이 내려오고, 조성학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사방에서 협격하니, 적은 포위망 속에 빠져서 진퇴의 길이 없었다. (중략) 적병은 죽은 자가 수십 명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한 자가 없었다. 한 참 동안 무찌르다 보니, 날은 이미 저물어 초생달은 서쪽 하늘에 떠 있는데, 서릿바람은 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