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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전화춘은 강원도 횡성에 거주하였다. 1907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 체결 이후 대한 제국 군대해산에 즈음하여 7월 30일(음 6월 21) 창의하여 의병장 오정묵(吳正默), 한상 열(韓相說) 등과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의병장 오정묵은 강원도 횡성 출신으로 원래 횡성군의 수순교(首巡校) 및 포수계장(砲手契長)이었다. 1907년 8월 군대해산에 즈 음하여 포수 20여 명을 이끌고 민긍호 부대(閔肯鎬部隊)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의병장 한상열은 강원도 횡성 출신으로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횡성에서 창의하여 휘하에 의병 약 200명을 거느리고 지평, 홍천, 원주, 평창, 영월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10월 한상열은 민긍호 부대에 투신하여 일본군에 항전을 하다가 민 긍호가 전사한 후 1908년 8월 전사하였다. 전화춘은 1907년 7월 30일 창의하여 강원도 강릉, 평창, 홍천, 횡성 등지에서 의병장 오정묵, 한상열 등과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 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여 청량리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귀가하여 휴양을 하였다. 1908년 2월 다시 일어나 김용상(金龍翔), 한상열, 노면영(盧免永) 등과 함께 활 동하였다. 강원도 춘천(春川) 등지에서 일본군에 패한 후 횡성군 청일면(晴日面) 춘당리 (春堂里)에 잠복하고 있다가 동년 7월 6일 체포되어 동면 율실리(栗實里) 부근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ㆍ暴徒에 關한 編冊(警務局, 1908), 暴徒史編輯資料(警務局, 1909) (274). 정낙인 1. 약전(略傳) 성 명 (異名) 활동 시기 출 신 거주지 생, 몰 참고문헌 및 전 거 활동내용 등 서훈및 포 상 * 정낙인 鄭樂寅 정미미상미상 〔경기도항일독립 운동사 p.73·78, 대한민국독립유 공인물록 p.622, 공훈록〕 1907년 8월부터 경북 문경(聞慶)・청풍(淸風), 충청도 괴산(槐山)・충 주(忠州), 강원도 원주, 경기도 여주(驪州)・지 평(砥平) 등지를 무대로 의병활동 애족장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