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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공훈록> 전성환은 1907년 음력 7월 경기도 양근(陽根)에서 조인환 의진(曺仁煥義陣) 소속으로 서울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뒤,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8월 3일 경기도 양근(陽根)에서 창의한 조인환 의진은 지평의진(砥平義陣)과 연 합하여 4~500여 명의 대부대를 형성하고, 양근 출신의 권득수(權得洙)와 합세하여 용문 산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리하여 조인환 의진은 1907년 8월부터 동년 9월 17일 양근 분 원동전투(分院洞戰鬪)에서 패할 때까지 양근, 지평, 양주, 파주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략 하며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인환은 분원동전투 패배 이후 행방을 감추고 말았다. 조인환 의진은 신창현(申昌鉉)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양근, 광주 등지에서 활동하다 가 동년 10월경 강원도 인제에서 민긍호 의진(閔肯鎬義陣)과 합세하여 13도창의대진소 (十三道倡義大陣所)에 참여하였다. 전성환은 농상소감관(農商所監官)이었는데, 조인환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서울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전 협판(協辦) 엄주익(嚴柱益)을 찾아가 군자금 10만 냥을 요구하 였다. 이후 체포된 전성환은 1907년 10월 26일 소위 내란죄로 평리원(平理院)에서 유형 (流刑) 10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ㆍ皇城新聞(1907. 11. 7) ㆍ官報(1907. 12. 3) ㆍ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별집 제1권 13면 3. 판결문 등 판결문 요약 이름/별명 전성환(全性煥)·라응완(羅應完) 당시나이37세·19세 본적/주소한성 남서 다동·한성 서서판결기관 평리원 죄 명내란생산년도1906 주 문유(流) 10년·유(流) 7년판결날짜1907.10.26 사건개요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조인환 도당에 투신하여 병기를 소지하고 의병군 량비를 사칭하며 엽전 십만 냥을 탈취하려다 미수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