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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부터 문무를 겸비하며 호연지기를 키워갔을 것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또 유학적 가 풍에 따라 엄격한 충효의 정신을 바탕으로 충군애국 사상을 배양해 갔을 것이다. 항일의병 투신 선생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는 것은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항일의병이 봉기하던 때였다. 선생이 장성하던 무렵, 일제의 침탈로 인해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특 히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기화로 일제는 청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침략을 더욱 가속 화해 갔다. 우선 일제는 1894년 6월 자국의 군대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무단 점거 하는 등 군사적 침략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개혁, 근대화라는 미 명하에 조선의 전통적 문물제도를 일시에 바꾸는 갑오경장을 강제로 추진함으로써 정치, 문화적 침략을 병행하였던 것이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이러한 일제 침략 의 일환으로 자행된 것이었다. 1895년 8월(음력)에 일어난 을미사변은 청일전쟁 이후 배 일세력의 중심인물로 부상되어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도발한 만행이었고, 갑오 경장의 일환으로 1896년 11월(음력) 공포한 단발령은 성인 남자의 상투를 제거함으로써 민족자존의 상징과 존엄을 무참히 짓밟았다. 이처럼 연속된 일제의 대한침략은 우리 민 족의 공분(公憤)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단발령 공포 직후 전국 각지에서 거의 동시다발 적으로 의병이 봉기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선생이 참여했던 남한산성 의진은 류인석이 이끈 제천의병과 이소응의 춘천의병, 민용호의 강릉의병, 노응규의 진 주의병, 권세연의 안동의병, 김복한의 홍성의병 등과 함께 전기의병(을미의병)을 상징하 는 단위부대로 평가되고 있다. 선생이 중심 인물로 참여했던 이천수창의소(남한산성의진)는 1895년 11월 15일(음) 단 발령 공포 직후 전국에서 가장 먼저 편성되어, 서울에서 가장 근접한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한 달 이상 점거한 채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두었을 정도로 성세를 크게 떨친 의진이다. 특히 서울의 인후인 남한산성을 점거하고 서울 진공계획을 구상한 것은 뒷날 1908년 1월 십삼도창의군의 별동대가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한 사례와 같 이 일제 침략세력에게 직접적이고도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 聞)등 일본 신문들이 남한산성 점거 과정에서부터 해체 때까지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같이 의진의 동향을 분석적으로 상세히 보도하였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선생이 항일의병 전선에 동참하게 되는 구체적인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선생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던 해운당(海雲堂) 김하락(金河洛)이 남 한산성의병이 태동되던 단계부터 해산할 때까지 과정을 일기식으로 기록한 자료가 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