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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며, 국가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恥辱)을 씻는 것으로 제1 의 대의를 삼아야 한다. 의병이 이르는 곳 각 영(營), 각 읍의 장관으로서 편리할 것을 생각하여 관망(觀望)하며 곧 호응하지 않는 자나 적의 편에 붙어서 군정(軍情)을 방해하 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모두 이적금수(夷狄禽獸)의 앞잡이요, 난신적자(亂臣賊子)의 도 당이니, 단연 군법을 시행하여 먼저 베고 후에 보고할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일본인들 에 대하여 왜노(倭奴) 즉 "왜놈"이라는 극단적인 호칭을 사용하고, 왜노와 거기에 아첨하 여 따라 다니며, 국모를 시해하고 군부의 머리를 강제로 깎은 무리들을 불공대천의 원수 로 규정지으며, 그들에 대한 복수 설치(雪恥)를 둘도 없는 큰 의리로 내세워서 의병의 명분을 뚜렷하게 하였다. 또 개화로 인한 풍속·사회의 변천을 크게 분노하면서 이적 금 수의 지경이 되는 것을 구출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유림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향이었다. 이것은 이른바 오랜 동안의 유교적 소중화(小中華) 사상의 일면모 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적에 대한 처벌 방법도 상당히 엄하여 각처의 관장으로서 즉시 호응하지 않고 주저 관망하는 자가 있으면 ‘선참후보(先斬後報)’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는 조인승(曹寅承)을 춘천부 관찰사 겸 선유사(宣諭使)로 보내어 도착하였는데 의진에서는 조인승이 원수의 역적들과 같은 무리라고 하여 잡아다 참형(斬 刑)을 시행하였다. 이것은 개화파의 관원으로서 의병들에게 처단당한 첫 예가 되었다. 이 소식은 내각 대신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외부대신이었던 김윤식(金允 植)은 조인승의 참형소식에 이어 청평(淸平)에 살던 참판 조인희(趙寅熙)가 의진에 가담 하지 않는다 하여 역시 살해당한 소식을 접하고 "갈수록 놀랍고 참혹하여 통한스럽다" 말한 것이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관련자로 파면되었던 조희연(趙羲淵)을 군부대신에 임용하고 이튿날로 곧 1중대의 병력을 춘천으로 파견한 것은 이러한 사실의 일단을 말 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초기에 크게 기세를 올렸던 춘천 지방의 의병 세력 은 그것이 대개 선비 중심의 봉기이었으므로 전술·전략에 익숙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신 우균(申羽均)·김귀현(金龜鉉) 등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세는 날로 예리하여 갔다. 또한 성중에서 다시 관군과 내통하는 자가 생김에 따라 차츰 성내 인심이 흩어져 의진 의 형세를 지탱하기도 어렵게 되어갔다. 이에 습재는 병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몸소 지평 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 협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월 17일 결국 습재 는 제천의 의암 류인석(毅菴 柳麟錫)의 의진으로 입진하였다. 이에 나머지 춘천 의진은 습재의 종형 이진응(李晋應)이 지휘하게 되었는데 곧 관군과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인하여 패전하고 주장은 전사하였다. 이후에는 진응의 아우 경응(景應)이 주장으로 추대 되어 의진을 계속 지휘하였다. 습재는 의암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역에서 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