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page

222 때를 기다려 복병이 일제히 사격을 하고 이강년은 산 위에서 독전(督戰)하였다. 탄환이 빗발같이 쏟아지자 적은 놀라고 짓밟혀 죽은 자가 과반이 되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달아 났다. 아군의 사망자 10명, 부상자 8명이었다. 이상으로 알 수 있듯이 이강년이 10여 년 간에 걸친 의병활동에서 비견될 바 없이 혁혁한 공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능숙하고도 대담한 전술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강년은 6월 4일 청풍 까치성(鵲城) 전투 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적의 탄환이 복사뼈에 맞아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으 며, 도선봉(都先鋒) 하한서 및 7명이 전사하였다. 이들을 돌아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내 가 잡힌 몸이 되었으니 별 수 없다. 전사한 사람들을 잘 매장하여 주기 바란다."고 부탁 하고 제천으로 압송되었다. 처음에 일인들이 그의 부상을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거절하고 일음일식(一飮一食)하였다. 그나마 일본인이 가져다 주는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후 그는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 서울로 압송된 후 평리원(平理院)에 이송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1908년 9월 19일(음) 51세를 일기로 순국하였으니, 그의 애국충정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795~801. 註ㆍ騎驢隨筆 123, 124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186・546・547・548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卷 223~226・228・229・230~242・246・ 256~264・276・278・279・380・384・394・396・400・408・414・423・428・ 429・441・442・482・496・549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3卷 572・600・622面 ㆍ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207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