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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이강년은 끝내 해산시키지 않았다. 11월 21일 전동 월계봉(錢洞 月桂峰), 12월 3일 낭천 간척리(狼川 看尺里), 그리고 12월 5일 경기도 건천(乾川)에서 각각 적과 대적하여 전투 를 전개하였다. 1908년 2월에는 주로 경기도 지역에서 활약하였는데 용소동(龍沼洞)에서 적 백여 명을 사로잡은 것을 비롯하여 대청리(待淸里)・갈기동(葛基洞)에서 적과 교전하 였다. 1908년에 이강년 의진이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둔 전투로는 3월 12일의 강원도 인제 (麟蹄) 백담사(百潭寺)의 전투와 안동 서벽(西壁), 4월 6일 봉화 내성(乃城) 전투, 그리고 4월 8일의 안동 재산(才山)의 전투를 들 수 있다. 1908년 3월 12일 백담사 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2일… 적이 많이 들어오므로 쳐서 무너뜨렸다. … 이튿날 새벽에 파수병이 3번이나 급한 정세를 보고하기를 적 500여 명이 북쪽에서 온다고 했 다. 군중이 모두 나가 좌우로 독려하여 반날을 격전하니 적이 크게 무너지므로 추격하여 무찔렀는데 적의 죽은 자가 수백여 명이며 우리 군사의 사상자도 수십여 명이었다. 이날 간성(杆城) 신흥사(神興寺)로 옮겨 주둔하고 군사들을 교련시켰다. 다음날 다시 오세암 (五歲菴)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이들 이강년 의진은 하루를 교전하고도 여력이 남아 있 어 군대를 이끌고 설악산(雪嶽山)을 넘나들며 훈련하였으니 이들의 능란한 기동력을 가 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대는 일찍이 관동의진의 민긍호가 활약하던 지대로서 그가 체 포된 후 곧 이어 이강년이 장악한 것이다. 이때 이강년은 이준명(李準明)・정원팔(鄭元 八) 등 260명의 대부대를 거느리고 산악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이강년은 강원도를 떠나 4월에 경북 일월산(日月山)을 거점으로 삼고, 산하 의병 장인 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顯)・김상태(金尙台)・정경태(鄭敬泰)・백남규(白南 奎)・정연철(鄭連哲) 의진 4천여 명을 서벽(西壁)에 주둔시켰다. 이에 대하여 일군은 영 천(永川)수비대를 파견하였으므로 이들과의 전투가 불가피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 수백 명을 사로잡고 2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 때 적들은 내성(乃城)으로 퇴군하였으며, 의진 역시 내성 쪽으로 행군하여 유진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적 수백 명이 영천으로부터 온다 고 파수병이 고하였다. 이강년은 먼저 복병을 설치하고 적을 맞이하여 싸웠다. 반나절 동안 전투하여 적을 물리쳤으며 이때 설치한 설복비계(設伏秘計)에 대하여 의진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의진이 안동 재산(才山)에 이르자 대구로부터 적의 내습이 있었다. 이강년은 이만원(李萬源)・권용일(權用佾)을 동구(洞口)에 매복시키고, 하 한서를 왼쪽에, 성익현(成益鉉)을 오른쪽에 매복시키고, 백남규는 분병(分兵)하여 양쪽에 매복하도록 한 후, 이강년은 갑사(甲士)들을 거느리고 남산(南山)에 올라가 적을 기다리 고 있었다. 적은 의병 복장으로 변장하고, 의병기를 들고 달려왔다. 적이 깊숙이 들어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