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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었다. 7월 15일 행군을 시작하여 문지동(文池洞)을 거쳐 마수막(馬首幕)에 이르러 충주 (忠州)를 치고자 하여 산하의 의진을 풀어서 작전을 실시하였으나 각 의진이 시기를 지 키지 않아 충주진격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불당곡(佛堂谷)의 이주승(李胄承)의 집에 머물면서 『국수원류』, 『군계(軍戒)』12귀, 통고문(通告文) 등을 지어 군율을 가다듬었다. 이어서 풍기 도촌(豊基道村)에서 김기찬(金基燦)과 일진회 회원 김상호(金商虎)를 총살하 여 친일행위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7월 30일 문경(聞慶) 주흘루(主屹樓)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였는데, 적은 밤을 틈타 도망하였다. 원주에 묻어둔 탄환을 보충하여 전력을 보강시켰으며, 이때 공을 세운 이만원(李萬源)을 도총독장(都總督將), 권용일(權用佾)을 우군 선봉장에 임명하였다. 청풍의 조동교(趙東敎)・여주의 김현규(金賢圭)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였다. 특히 김현규 의진에는 해산군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8월 2일 적군이 초곡(草谷)에 이르러 대전하게 되자 조동교와 김현규가 군대를 이끌고 가버려 작전의 허가 드러나 모항령(毛項嶺) 전투에서 32명의 인명 피해를 보게 되었다. 다음날 혜국사(惠國寺) 승려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용기 백배하여 갈평(葛坪)으로 진 격하여 적을 쳐부수고 총과 탄환・투구 등을 노획하였다. 이튿날(4일) 다시 갈평에 나가 순검 1명을 총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괴성(槐城)에서 적의 대장 과전삼태랑(戈 田三太郞)과 육군 보병 대토촌(大土村)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6일에는 대승사 (大乘寺)에서 적 5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8일 후군장 신태원(申泰元)이 문경 적성(赤城)에서 참패하여 아군 36명이 순국하였다. 이후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단 양 유치(楡峙)・영월(寧越)・병두(屛杜)・연풍(延豊) 등지에서 적과 대치하였으나 전세는 다소 불리하였다. 9월에 들어서면서 전 정언(正言) 김상한(金商翰), 전 군장(前軍將) 윤기영, 소모장 주광 식(朱光植)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자 전세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9월 16일 제천 추치에서 대전하여 적 200명을 사로잡았고, 9월 27일 죽령(竹嶺)에서 다시 적 200명을 사로잡았으며, 10월 5일 단양 고리평(故里平)에서 적 80명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해졌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산중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적과 대치하 게 되자 전세는 불리해졌다. 10월 6일의 소백산정(小白山頂)에서의 전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한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10월 23일 풍기 백자동(栢子洞) 전투에서 다시 적 100명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이강년은 그간의 과로와 연이은 패전이 원인이 되어 득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12일 풍기 복상동(復上洞)에서 적을 만나 대적하였으나 그 결과는 대패였다. 이때 이강년은 "내가 거의한 지 12년에 이와 같이 패 배한 때는 없었다." 하고 탄식하며 부하 장령들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월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다음해 봄을 기약하고 의진을 해산하는 것이 일반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