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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군장 홍대석(洪大錫)과 함께 6초(哨)를 거느리고 수안보(水安保)의 병참을 공격하였으며, 2월 13일 9초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尹基榮)과 함께 문경 평천(枰川)으로 진군하였다. 4월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리는 관군에게 제천 의진이 패하자, 류인석은 거수지계(去守 之計)를 정하고 요동으로 건너갔다. 이때 이강년은 후군장(後軍將)을 맡아 류인석의 뒤를 쫓아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영월(寧越)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小 白山)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7월에 소백산에서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그는 단양 금채동(丹陽 金采洞)에 은신하였다. 1897년 4월 요동으로 건너가 류인석을 만나고 7월에 다시 단양으로 돌아왔다. 을미 의병 활동 중에 류인석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으므 로 그 이후 호남・영남 지방의 선비들을 만나 성리(性理)・전고(典故)・예악(禮樂) 등에 대한 토론을 통하여 자기 수양에 골몰하였다. 또한 1899년 충주(忠州) 유림에서 화서(華 西)의 문집을 출간할 때 충주에까지 가서 편집・간행・배포에 앞장섰다. 1907년 3월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므로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단양(丹陽)・제천(堤 川)・원주(原州)・연풍(延豊)・영월(寧越)・횡성(橫城)・강릉(江陵)・청풍(淸風)・충주(忠 州)・문경(聞慶)・예천(醴泉)・영주(榮州)・봉화(奉化)・안동(安東) 등 3도 14군을 휩쓸며 적과 대적하였다. 특히 1907년 7월 5일의 제천 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여 사 기가 충천하였고 이어서 경상・강원・충청 일대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이때 군대 해산에 반대하여 동료 진위대(鎭衛隊) 군인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민긍호(閔肯鎬) 의진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판서 심상훈이 원주 배양산(培陽山)으로 찾아 와 노고를 치사하였다. 조정으로 돌아가 고종(高宗)에게 그 전과를 아뢰었다. 고종은 이 강년에게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제수하며 다음과 같은 밀조(密詔)를 내렸다. "아! 나의 죄가 크고 악이 충만하여 황천을 돌보지 않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 이 틈을 엿보고 역적 신하가 권세를 농락하여 4천년을 내린 종묘 사직과 3천리 넓은 강 토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지역이 되었도다. 생각하면 나의 실낱같은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 사직과 만백성을 생각하니 이것이 애통하도다. 선전관 이강년으로 도 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지방 4도에 보내니 양가(良家)의 재주 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 병을 일으키게 하며 소모장(召募將)을 임명하되 인장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 라. 만일 명을 쫓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이고 파직하여 내쫓을 것이며, 오직 경기(京畿) 진영의 군사는 나와 함께 사직에 순절(殉節) 할 것이다.” 이때 주천(酒泉)에 40여 진이 모여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중군장 김상 태(金尙台), 우선봉장 백남규(白南奎), 좌선봉장 하한서(河漢瑞), 전군장 윤기영(尹基榮), 우군장 이중봉(李重鳳), 좌군장 이용로(李容魯), 감군장 이세영(李世榮) 등의 편제를 갖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