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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공훈록> 이강년(李康秊) 1858. 12. 30~1909. 10. 13 호 : 운강(雲崗) 자 : 낙인(樂仁), 이명 : 강 년(康年) 이강년의 본은 전주이며, 경북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聞慶郡 加恩面 道胎里)에서 이기 태(李起台)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벼슬하지 못한 한적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이강 년은 1880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사과(副司果)로 선전관(宣傳官) 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였 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벼슬아치 출신으로서 동학운 동에 참여한 예는 극히 드물지만 민족적 정의감이 그로 하여금 동학의 척왜(斥倭) 운동 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그는 농민군을 거느리고 관군에 대항하고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이어서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이 노골화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강년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자 결심하였다. 처음에 훈척(勳戚) 심상훈(沈相薰) 을 찾아가 함께 거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가 응하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제천 (堤川)에 류인석(柳麟錫)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1896년 1월 11일 출생지인 문 경(聞慶)에서 봉기하였다. 그전에 그들의 기미를 알아채고 달아나는 안동관찰사(安東觀察 使) 김석중(金奭中)・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 등 3인을 생포하여 농암(籠巖) 시장에서 그들이 적의 앞잡이 노릇한 것을 규탄하고 효수(梟首)하였다. 일련의 사건으로 소모한 의병을 거느리고 안동(安東)의 창의대장 권세연(權世淵)을 만나 군사상의 문제를 의논하였으며, 1월 15일 고성(姑城)에서 적병을 맞아 교전하였다. 1월 29일 제천으로 류 인석을 찾아보고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로써 류인석의 막하에서 유격장(遊擊將)이 되었 다. 이때 김상태(金尙台)・민순호(閔舜鎬) 등이 문경에서 거의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점으 로 보아 이강년은 대체로 생장지인 충청도에서 활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월 1일 전 2. 1906년에 倭人들이 高宗을 위협해서 讓位하라는 소문을 듣고 익년 삼월 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각지로 횡행하면서 倭人을 만나는 곳마다 습격 屠殺하였고 江原道義兵大將 閔肯鎬와 京畿道義兵大將 許 蔿와 상호연락하면서 倭兵大部隊와 여러 번 싸워 기세를 올림 3. 1908년 2월 加平에서 京城駐屯倭兵에게 체포되어 無限困辱에도 굴 하지 않고 死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