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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윤성호는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변보(變 報)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였는데, 이어서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 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그 분노는 폭발하여 토역복수(討逆復讐)를 부르짖고 의병대열 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중부지방에서는 류인석 문하의 제자들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가운데 이춘영(李 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이 1896년 1월 초에 이춘영의 처가인 강원도 원주(原州) 지정 면(地正面) 안창리(安昌里)에 모여 거사를 계획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 이들은 제 천을 점령하고 병력을 강화하니 그 기세가 매우 높았고 의병진영도 번성해 갔다. 이후 영월(寧越)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고, 류인석이 창의대장으로 추대되자 안승우는 호좌창의 군(湖左倡義軍) 전군장(前軍將)을 맡게 되었다. 이때 윤성호는 안승우 부대에서 우익장을 맡아 안승우를 도우며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1896년 4월에는 흥원창(興元倉)에서 참장(參將) 한동직(韓東直)을 따라 가흥(佳興) 부근으로 진군하였는데 당초 출정 의병들이 요망하던 병력의 증원이 여의치 않아 퇴각하 고 말았다. 그 후 류인석 의병장이 여러 사람들의 권고에 따라 서북방면으로 진출하여 서북지방의 군사들을 모집하여 장기 항전을 하기로 하고 서북행길에 올랐을 때 그도 동 행하였다. 그리고 6월 8일에는 충북 음성방면으로 가서 괴산 및 청주・공주 방면으로 이 동하며 적을 격파하기도 하였으며, 6월 10일에는 강원도 원주에 도달하였고 영월・평 창・정선・강릉을 지나 7월 11일에는 대화(大和)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름철에 장맛비는 계속 내려서 길은 미끄럽고 군사들의 식량은 모자라는데, 몰려드는 적군은 사면에서 기 승을 부리니 서북으로 가는 일도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정탐차 나갔던 윤성호는 마부 임을선(林乙善)과 함께 피체되어 지평 상동(上東)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3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174~175. 註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278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輯 414・418・422・451・462・526・527面 ☞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기록내용:(2000년 10월) -이명 : 임성호(林聖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