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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2. 공적조서 및 공훈록 <공적조서> <공훈록> 우상옥(禹相玉) (1877)~미상 강원도 강릉(江陵) 사람이다. 정봉준(鄭奉俊) 의진에 가담하여 충청・경기 일원에서 활약하였다. 일제는 1904년 2월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 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같은 해 8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 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 년 6월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丁未7條 約)」을 체결한 뒤,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행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말살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을 추출하고 친 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우상옥은 이 같은 시기에 정봉준 의진에 투신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 여 그는 1907년 음력 8월 15일 정봉준 의진의 종사원으로 동료 의병 700여 명과 함께 충북 괴산군 칠성암(七星岩)에서 일본군 80여 명과 교전하였다. 이후 그는 정봉준 의진 에서 종군하면서 경기도 지평(智平, ‘砥平’의 오기임;편자 주) 삼산동(三山洞)에서 일본군 성 명우상옥 한 자禹相玉 이 명없음 성 별남 생년월일(1876) 사망년월일미상 본 적강원도 강릉 주 소江原 江陵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1995 훈 격애국장 공적개요 1907年 8月 鄭奉俊義兵陣의 從事로서 700여명의 군사들과 함께 忠北 槐 山에서 日軍 80여 명과 交戰, 敗退시키고 京畿 砥平에서 日軍 300여명과 3일간에 걸친 激戰을 치렀고 忠州 木溪에서는 日軍 10여 명과 交戰하여 2명의 日兵을 처단하였으며 忠北 靑龍里에서 日軍 500여 명의 기습공격 을 받아 다리에 銃傷을 입고 被逮되어 終身 流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