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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아, 그대들은 어지러운 세월을 만났도다. 바다 도둑이 넘나들고 적신이 날뛰니, 기강이 무너지고 법도가 없어짐이 이보다 더할 수 없도다. 끝내 국모가 시해되고 임금이 머리를 깎여 이 나라가 전부 이적금수가 되고 말았구나. 의로운 깃발 아래 그대 7인이 몸을 빼 어 힘써 싸우다가 날아오는 탄환을 맞고 거듭 불태움까지 당하여 형체를 가려낼 수 없어 한 무덤에 함께 묻히게 되었으니, 혼령이라도 서로 의지할지어다. 아, 혹독한 화란과 참 혹한 순절이 예로부터 많았지만 오늘 그대들처럼 심한 경우는 아직 없었도다. 이 어찌 우리 군중에서만 애통할 일이랴. 천지신명도 감동할 일이로다. 6. 의로운 순국 선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관파천 이후 제천의병은 여러 측면에서 활동에 제약을 받아 점차 그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문제는 민심이 점차 의병을 외 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단발령 직후 처 음 의병이 일어날 때 무한히 의병을 모열 (慕悅)하던 민심이 단발령의 철회 이후 오 히려 의병을 부담스러워 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민심의 이반은 의진의 사기와 직결되었다. 이처럼 사기가 떨어지고 규율이 흐트 러져갈 즈음, 서울에서 군대를 이끌고 내 려온 선유사 장기렴(張基濂)이 수차에 걸 쳐 의병 해산을 종용해 왔다. 제천으로 내 려온 장기렴의 경군(京軍)은 김하락 등이 주축이 된 남한산성 의진을 격파한 뒤 그 여세 를 몰아 남하한 부대였다. 장기렴은 단발령이 철회되고 을미사변의 원흉격인 김홍집 이 하 친일파들이 축출된 지금에는 활동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즉시 의진을 해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에 대해 의병장 류인석은 “십적의 무리가 포열해 있는 것이 전과 같고, 왜적의 병참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전과 같고, 복색을 바꾼 것이 전과 같고, 관제 의 변혁과 주군의 혁파가 전과 같다.”라고 하여 의병 해산을 완강히 거절하였다. 일제와 결탁한 집권세력이 개화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는 결코 의병을 해산할 수 없 다는 논리였다. 류인석이 보여준 해산 거부 이유와 논리는 곧 선생이 견지한 사상․ 신념 과 그대로 일치하였다. 의리, 명분론적 관점에서 항일투쟁의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