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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려고 결심한 것은 청일전쟁 개 전 직전인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 점거한 갑오변란을 계기로 해서였 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시국을 개탄하며 류중교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서상렬(徐相 烈)․ 이범직(李範稷) 등 동문들과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중지하였다. 그 뒤 1895년 3월에 변복령(變服令)이 공포되어 백색의 전통 의복을 흑색의 ‘오랑캐 의 복’, 곧 양복(洋服)으로 바꾸어 입게 하자 이를 크게 탄식하였으며, 이어 1895년 8월에 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국모인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1월에는 상투를 자르게 한 단발령 이 공포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제가 군사․정치 양면에 걸쳐 입체적으로 국권을 침탈하는 등 망국적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선생은 “5백 년 종묘사직이 지금에 와서 망하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 가?”라고 하며 통분하였다. 또 류중교 사후에 화서 학파의 수장(首長)이 된 류인석은 문인사우들을 제 천의 장담(長潭)에 소집하였다. 류인석은 “이제 성 토하다 죽고 거의하다 죽으리니, 선왕의 도를 수호 하다 죽는 것은 선비의 의리다.”라고 성토하고, 이 에 유생의 신분으로 변복령이라는 ‘대변고’에 정당 하게 행동할 수 있는 방안을 숙고한 끝에, 첫째, 거의하여 일제를 소탕하는 방안, 둘째, 고국을 떠 나 국외로 가 대의를 지키는 방안, 셋째, 의리를 간직한 채 자정(自靖)하는 방안 등 ‘처변삼사(處變 三事)’를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행동 방안 은 수구파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행동강령이 되었다. 선생은 처변삼사 가운데 의병을 일으키는 거의(擧義)의 방안을 선택하였다. 이때 지 평에서는 단발령이 발포된 직후 열혈지사 이춘영(李春永, 1869~1896)이 의병을 일으키 기 위해 선생을 찾았다. 하지만 당시 선생은 제천의 장담에 있었으며, 대신 선생의 부친 안종응이 그를 맞았다. 이춘영은 지평의 포수 김백선(金伯善)을 만나 보라는 안종응의 조언을 듣고 김백선을 만나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김백선 역시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의 단발 명령을 거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춘영은 김백선과 함께 지평 포군 4백 명을 동원하여 안창(安昌, 현 원주시 지정면 안창)에 집결하였다. 그곳에는 이 춘영의 장인 김응수가 군비를 마련해 놓고 의병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