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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천지신명이 너희들만을 바라고 있다. 너희들 일신의 임무가 이 얼마나 중한 것이냐. 너 희들은 전일의 그 몸으로 생각지를 말고, 하늘의 명을 받들어 일한다고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하며 독려하였다. 이즈음 의병을 해산할 것을 권유하는 선유 조칙이 내려왔다. 이에 주화론(主和論)이 일 어나게 되자 안승우는 "이 무리들은 모두 왜의 형상을 하고 국모를 시역한 자들이니 우 리가 이들 적을 토벌하는 것을 반드시 왜보다 먼저 하여야 할 것이다."고 주장하여 주화 론은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4월 초순부터 경군(京軍)이 내려와 형세는 더욱 어려워졌다. 의진의 일부에서 본진을 제천에서 조령으로 옮기자는 의논이 비등하였으나 안승우는 "영 남으로 가는 것은 이 될 것이 없고 적에게 약점을 보이며, 도 제천을 중심으로 한 일대 의 백성들이 그동안 힘을 다하여 군수품을 공급하고 크게 기대하는 터인데 일로에 버리 고 갈 수 없다." 고 극력 반대하여 그대로 제천에 머물게 되었다. 5월 23일 최후의 결 전을 맞이하였다. 의진은 수비책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경군은 의병진의 파수가 있는 곳 을 만나면 우회하여 뒤로 나와서 바로 제천읍을 향하니 대전할 겨를도 없이 이미 의병 주둔처 깊숙이 들어왔다. 24일 비가 와서 주무기인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었다. 25일 안 승우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새로 쌓은 남산성에서 싸움을 독려하여 손수 화약을 재어 군 사들에게 주면서 격려하였다. 의병의 사기는 다시 충천하였으나 바람의 방향이 불리하게 되어갔으며,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내렸다. 의병의 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었는데 적의 총 탄은 비 오듯이 쏟아졌다. 이에 안승우는 돌을 던지며 대항하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창 의 중군 안승우는 여기에 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면 빨리 오너라." 하였다. 결국 안 승우는 적에게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절명하였다. 이때 안승우의 제자로서 중군 종사 로 활약하던 19세의 청년 홍사구(洪思九)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710~714. 註ㆍ騎驢隨筆 29・31・33~36・38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163・164・259・264・269~276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卷 191・349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