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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성에 입성할 수 있었으나 적의 책동에 의하여 세력이 분산된 틈에 성을 빼앗기고 다 시 제천으로 돌아왔다. 이때 안하사는 심상희를 원주의 이인영 의진에 합류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심상희 는 합진을 달가워하지 않아 이인영과 틈이 벌어졌다. 또한 심상희는 제천의진의 가흥 (佳興) 진격 등에 대하여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제천의진의 선봉장 김백선은 본진의 증원병도 오지 않은데다가 심상희의 미온 적인 태도, 그리고 심상희 의진의 참장 한동직(韓東直)의 방관 등으로 인하여 패전하 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결국 김백선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총살 형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제천의진은 크게 약화되는 전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심상희가 일찍이 여주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렇다 할 활약상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다른 의진과의 합진을 통하여 의진의 세력확대를 도모하지 않았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심상희가 경기 지방에서의 의병운동 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데서 기인한다. 그 후 5월에 심상희는 의병을 해산하라는 임금의 선유문(宣諭文)을 받고 즉시 의병 을 해산시켰다. 심상희의 중군장인 원용석(元容錫)의 보고를 듣고 류인석은 대노하여 장문의 격서(檄書)를 보내어 책망하였다. 그런지 며칠 후 참장 한동직과 전군 전규석 (全圭錫) 등이 해산당한 의병을 이끌고 와서 제천의진에 대거 입대하였다. 그해 12월에 류인석은 다시 전귀석을 심상희에게 파견하여 창의할 것을 권유하여 여주 의병진의 대장이 되었으나 적극적으로 활동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696~ 698. 註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162・217・218・259・260・261・262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卷 315・323・502・504・588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