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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이들은 전선(電線)을 끊고 일본인들을 살해하는 등 반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 은 여주 일대는 물론 충청도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한편으로 광주(廣州)와 이천(利川) 등지의 의병진과도 연락하여 가면서 크게 기세를 올렸다. 한편, 경기 일대에서는 연합 의진의 기미가 무르익어 갔다. 즉, 민승천(閔承天)・김 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 金 準) 등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의진 은 1896년 1월 18, 19일에 백현(魄峴), 장항(獐項) 전투가 있은 다음 2월 13일 이현 (梨峴)에서 적의 습격을 받고 군사들이 일시 흩어졌으나 다시 재수습하고 2월 25일 이현으로 집결하였다. 그리고 구연영(具然英)・전구석(全龜錫)・김태원 등이 광주・이천・양근(楊根) 지방 의 포수・민군(民軍)들을 집합하여 거느리고 왔다. 이때 김하락(金河洛)이 심상희에게 연합의진에 대하여 의논하였으므로 여주의진 일부를 보내주었다. 그리하여 연합 병력이 2천여 명에 이르게 되자 각 부서를 다음과 같이 재편성하였 다. 대 장 박준영(朴準英) 선 봉 김태원 여주대장 심상희 중 군 구연영 군사 겸 지휘 김하락 좌 익 장 김귀성(金貴星) 도 소 모 전귀석 후 군 장 신용희(申龍熙) 이처럼 심상희를 그대로 여주 대장으로 한 것은 심상희의 여주 의병이 그 다수를 점유했기 때문에 완전한 연합군이 형성되지 않고 여전히 심상희의 지휘권이 인정되 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 경기의진은 2월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그곳을 본진으로 하여 유진하면서 만 반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의병대장의 배신으로 인하여 의진은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남한산성을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특히 김하락은 영남 지방으로 진격하 여 여러 의진과의 연합을 도모하였다. 한편 류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한 제천(堤川)의진은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 禹)・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 그리고 김백선(金伯善) 등이 주축이 되어 충주(忠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