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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 이후 조인환 의진의 의병장으로 추대된 신창현은 300여 명의 의병들을 이끌고 양근과 광주 지방에서 대일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같 은 해 9월 의진을 인솔하여 강원도 인제(麟蹄)로 이동하여 민긍호(閔肯鎬) 의병장을 만났 다. 민긍호는 원주진위대의 특무정교로 근무하던 중 일제의 군대해산 명령이 있자 이를 거부하고 300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원주우편취급소와 일본군을 습격한 뒤 의병전쟁에 참전한 대한제국군 출신의 의병장이었다. 이때 민긍호는 한갑복(韓甲福)・지용기(池龍 起)・이인재(李仁在)・이강년(李康秊) 등 5개의 의진과 연합하여 활동하려던 참이었다. 이 에 같은 해산군인 출신으로 의기 투합한 민긍호와 신창현은 자연스럽게 의진을 합진하니 그 연합의진의 병력이 1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연합의진은 인제・양양(襄陽)・춘천 (春川)・원주(原州)・홍천(洪川) 등 강원도 일대, 충북 쌍호(雙湖) 부근, 경북 송면장(松面 場) 부근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신창현은 1908년 2월 29 일 민긍호가 전사 순국한 이후 상경하였다가 같은 해 5월 20일 피체되어 9월 15일 경성 공소원에서 종신 유형(流刑)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783~784. 註ㆍ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127・151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532・713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3輯 666・706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68・69面 3.판결문 등 판결문 요약 이름/별명신창현(申昌鉉) 당시나이29세 본적/주소경성부 남서후동 67통 3호판결기관 경성공소원 죄 명내란 생산년도1908 주 문유(流) 종신판결날짜1908.09.15 사건개요 이천군 주둔 의병장 김봉기, 양근군 조인환의 부하로 일본군에 차례로 패 전하자 민긍호와 합병하여 또 패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