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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2. 공적조서 및 공훈록 <공적조서> <공훈록> 신창현(申昌鉉) 1880~미상 서울 사람이다. 의병장으로 경기・강원 지역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에 들어와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 을 기화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인 군대까지 해산케 하였다. 이에 민족의 무력을 상실된 것을 통분해 하던 대 한제국의 병사들은 스스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투쟁하든가, 아니면 기존의 의병 부대에 투신하여 일제에 항전함으로써 의병전쟁을 국민전쟁으로 발전시켜 갔다. 신창현 또한 대한제국 기병대 병사로서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 직후 김봉기(金奉基)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전쟁에 뛰어들었다. 당시 김봉기 의병장은 이근풍(李根豊)・주창룡(朱昌龍) 등과 함께 경기도 광주(廣州)・용인(龍仁)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거의하고, 이천(利川)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신창현은 이 의진에 가담하여 17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2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신창현은 김봉기 의병장이 피체된 이후에는 경기도 양근(楊根)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조인환(曺仁煥) 의진에 들어가 광주군 분원(分院)에 성 명신창현 한 자申昌鉉 이 명없음 성 별남 생년월일 (1881, 공훈록의 생년은 1880년임;편자 주) 사망년월일미상(1909.12.20;편자 주) 본 적서울 南署 後洞 주 소서울 南署 後洞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1995 훈 격독립장 공적개요 大韓帝國軍 騎兵으로서 軍隊解散 후인 1907年 陰曆 7月부터 2개월간 京 畿 利川郡에서 金鳳基 義兵陣에 가담하여 2차에 걸쳐 일본군과 교전하였으 며, 같은 해 陰曆 8月 曺仁煥 義兵陣에 가담하여 京畿 廣州郡 分院에서 일 본군과 交戰하고 조인환을 대신하여 義兵將이 되어 3백여 명의 군사들을 인 솔하고 楊根, 廣州郡 일대에서 활동, 같은 해 9月 江原 麟蹄郡에서 閔肯鎬 義兵陣을 비롯한 제 의병진과 연합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교전하 였고, 같은 해 10월에도 江原道 襄陽, 春川, 忠北 雙湖, 慶北 松面場에서 일본군과 交戰하는 등 활동하다가 1908년 음력 5월 被逮되어 終身 流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