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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鼎足) 부근에서 약 삼백 명의 의병들이 일군과 격전을 벌이고, 23일에는 횡성군 봉복사 (鳳腹寺)에서 약 350명의 의병들이 일군과 격전을 벌여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 후 민긍호 의병부대는 10월 26일 횡성 둔촌(屯村)에서, 11월 27일에는 홍천 서남 양 덕원(陽德院)에서, 12월 8일에는 원주 동북 작곡(鵲谷)에서 계속 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 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08년 2월 28일 원주 치악산 아래인 강림(講林) 동쪽 약 10리되 는 등자치 부근에서 적에게 노출되었다. 적군은 강림에서 출발, 사자산(獅子山), 구룡산 (九龍山) 방면으로 우회하여 등자치로 접근하였다. 이 때 민긍호의 부대는 그 10리 지점 인 궐덕리(蕨德里)에 잠복하고 있었다. 29일 오전 11시에 접전하여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의병 20여 명이 사살되고, 민긍호는 사로잡혀 강립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민긍호의 부 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하여 민긍호를 탈환하고자 하였다. 의병 중의 한 사람이, "우리 대장 민씨는 어디 계신지 소리를 치시오." 하였다. 이에 포박된 민긍호가 도주하자, 일군 은 그를 사살하였다. 이때 의병 열한 명이 전사하고, 의병진은 북방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민긍호가 거느린 의병 부대는 당시 강원도 일대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의병 부대였다. 그는 강원도・충청도・경상도로 전전하면서 전부 백여 회의 대소 전투를 벌여 일군에게 가장 많은 타격을 주었다. 일군의 기록인 ‘의병 토벌 결과의 개요’ 가운데서도 민긍호 의 병 부대에 대하여, ‘각처에 있어서 약간의 폭도를 넘어뜨리기는 하였으나, 폭도의 출몰이 교묘하여 토벌의 효과가 현저하지 못하다.’ 라고 하여, 일군들이 그들의 작전 실패를 자인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민긍호 의병 부대의 눈부신 활약과 그 전과를 그대로 우리들 에게 잘 알려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603~606. 註 ㆍ騎驢隨筆 122面 ㆍ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1卷 127・128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567・568・570・582・583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3卷 597・678・733・734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