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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유배시키면서 다시 폐현되었다. 1391년(공양왕 3) 현지경에 철장을 두고 감무를 설치하여 겸하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에도 양근은 군이었는데 1658년(효종 9) 지평(砥平)에 편입시 켰다가 1668년(현종 9)에 다시 설치하고, 1728년(영조 4)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741(영조 17)에 복구하였으며 1776년(정조 즉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785(정조 9년)에 복구하였다. 옛 치소는 건지산(乾止山 : 지금의 옥천면)에 있었는데, 1747년 (영조 23)에 갈산(葛山 : 지금의 양평읍)으로 옮겼다. 1895년(고종 32)에 다시 군으 로 고치고 10개 면을 관할하였다. 지평은 1413년(태종 13)에 비로소 현감으로 고쳤으니 이는 고려조인 1388년(우왕 14)에 전국 여러 현에 감무를 두고 참외•권무•이전 등 모두 낮은 관직으로 임명하였 던 것을 시정하여 현과 그 책임자의 위상을 높여주고자 예와 같이 복구시켰던 것이 다. 그러나 1685년(숙종 11)에 강상죄인 해옥의 일로 폐현되어 양근에 편입되었다가 1688년(숙종 18) 다시 설치하였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고치고 8개 면을 관 할하였다. 1908년 양근과 지평이 통합하여 양평이 되기 전까지 두 고을은 가까운 이웃고을 이었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10년간은 지평으로 두 고을이 합해졌고, 3년간은 양근 으로 합해져 두 번에 걸쳐 13년간 합해졌던 역사도 있다. 대한제국기인 1908년(순종 융희 2) 9월 14일, 두 고을은 통합되었고 군호를 양근 의 양(楊)과 지평의 평(平)을 따 양평(楊平)이라 하였다. 통합 당시의 관할 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양근군의 10면과 지평군의 8면을 합한 18면이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그 후 1912년 5월 23일에 발간된 조선총독부편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 경 기도편에 양평군은 19개면 354리를 관할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12월 29일에 공포된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1914년 4월 1일 자로 남종면을 광주군에 편입시키고 여주군 금사면(金沙面)의 전북(箭北), 용담(龍潭) 의 각 일부와 같은 군 대송면(大松面)의 곡수(曲水), 산촌(酸村)의 각 일부와 대신면 (大神面)의 전후곡(前後谷) 일부와 개군면(介軍面)의 공세리(貢稅里) 일부와 광주군 퇴촌면(退村面)의 영동리(嶺東里)와 강원도 원주군 지정면(地正面)의 판대리(判垈里) 일부를 병합하였다. 1915년 5월 1일에 공포된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12개면 112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