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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상열이 7읍에서 수천 명 모집, 안동에 유진하며 예천에서는 군 수를 처단, 상주에서는 태봉에 주둔한 왜군을 토벌 〔✒전거〕『山居漫錄-附,日記』, 장충식 〔F자료3, 268쪽〕 3.30 정부, 일본공사에게 개성-서울간 노선 및 북로전선 경원간(京元間) 의 조속반환 요구 3.30이필희(李弼熙)를 진동장(鎭東 將)을 삼아 원주를 수비 〔✒전거〕「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下)」, 박정수 〔F자료2, 201쪽〕 3.31예천(醴泉) 군사가 문경현(聞慶 縣) 북면(北面) 평천(平川)으로 옮겨 주둔 〔✒전거〕「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下)」, 박정수 〔F자료2, 201쪽〕 4.1 러시아 특명전권공사 민영환(閔泳 煥), 윤치호(尹致昊) 등과 러시아 로 출발 ▲ 네이버항공뷰, 강상면 병산리 백운봉 방향 4.1호좌의진, 원우규(元友珪)로 별 장을 삼아 단정(端亭)을 수비 / 아장(牙將) 서석화(徐石華) 등이 김백선(金伯善)의 시체를 호송 하여 지평(砥平)으로 가서도 민 의식(閔義植)에게 아부하여 한 무리가 되고, 백선의 아들들에 게 안승우를 모함 〔✒전거〕「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下)」, 박정수 〔F자료2, 203쪽〕 『동경조일신문』보도내용(1896년 4월 1일자 3월 18일 경성 발) : ‘남한산성의 적수(賊數)는 약 1 천6백 명으로 그 중에 1천 명은 광주·이천·양근 등의 포군 즉 구 지방병이고 그 나머지 6백 명은 광주의 농민이다. 적의 수괴는 광주의병장 심영택(沈營澤), 이 천의병장 박주영(朴周英), 양근 의병장 이석용(李錫容, 이승룡 의 오기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 설임;편자 주)의 3인이다.’ 〔✒전거〕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9, 1971, 129~131쪽 〔F자료4, 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