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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다. 砥平邑을 敗縣邑으로 한 것과 敗峴과 敗峴里라는 지명은 公이 戰歿한 후부터였으니 敗峴을 지나는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西厓 柳公 成龍이 표창하는 啓에서 “집에 충효를 전했고 義烈이 함께 빛난다”고 하였으며, 藥峯 徐公 渻이 遺札에서 “당당 히 왜구를 분쇄하고 한손으로 천지의 氣를 붙들었다” 하였다. 슬프다! 세상은 이러한 역사를 알지 못하고 지금의 節雲고개를 敗峴 혹은 仇叱峴이라 하였으며 배잔마을이 敗峴里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 公이 의병을 이끌 고 왜적과 싸우다 승리한 곳이요 또한 패배하여 그 일가족이 참혹하게 순절하였고 수많은 의병들이 義魄이 되어버린 忠義孝烈의 고장이라는 역사적 자취도 찾아보기 어렵다. 二千 六年 병술 봄에 公의 十三代孫婦 李裕貞 여사가 방홍규 전 지평의병정신선양회장과 함께 不佞에게 公을 宣揚해주기를 기대하였었다. 五年이 지나 庚寅年 四月一日에 方회장과 하 동정씨 익위공파종회 基瑞회장과 淸元 海君 等이 다시 찾아와 상촌장학회에서 公의 전적 비를 세워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촌장학회가 그 설립취지에 따라 公의 戰跡碑를 세우 기로 하니 하동정씨익위공파종회에서 흔쾌히 큰 재물을 내놓고 한국농어촌공사양평지사가 대평리 五三四번지를 竪碑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銘한다. 河東의 선비하나 風度가 준수하네 忠孝를 본받았고 義烈에 엄정하니 文武를 겸전하여 將帥의 기상일세 동해에 倭賊떼가 물밀 듯 침범하니 임금은 蒙塵하고 社稷이 위태하자 상복을 벗어놓고 救國에 앞장섰네 혈서 쓴 깃발 들고 義旅를 호소하매 모여든 의병들은 사기가 충천하니 기발한 전략으로 적군을 분쇄했네 반복된 승전고에 산천도 감응했지 슬프다 중과부적 패전은 운수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