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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강직하고 直提學을 역임하였다. 曾祖 諱 權은 翊贊으로 六臣참화후 속리산에 숨어 의리 를 지켰다. 考 諱 如虎는 號가 玉野인데, 童蒙敎官 軍資奉事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牛溪 栗谷 諸賢과 道義로 사귀었다. 妣는 丹陽張氏 將士郞 士良의 딸로 婦德을 갖추었 다. 公은 一五三一年 三月九日 서울 아현리 충효의 가정에서 출생하였는데 총명하고 풍채가 준수하였다. 文科시험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말하기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 나서 학문으로 대성하지 못하면 무예로써 마땅히 亂을 다스리는 것이 또한 길이다.” 하고 弓馬의 무예를 익히더니, 宣祖 癸酉年 武科에 급제하여 宣傳官 兼 司僕內乘과 都摠都事 가 되었다. 함평현감으로 나가서는 치적이 밝아 遺愛碑를 세웠다. 내직으로 訓練副正을 역임하고 柳 相國 泓의 종사관으로 중국에 朝會하고 돌아와서는 光國功臣에 올랐다. 公은 一五九一年 아버지喪을 당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여주 상백리 묘소에서 侍墓살이를 하였다. 이듬해 倭寇가 침입하니 선조대왕이 몽진하는 등 나라가 위급한 상태에 빠졌다. 公은 자발적으로 倡義護國의 旗幟를 들고 侍墓를 중지하고 손가락을 잘라 血書로써 고을 사람들에게 통고하기를 “東海 건너 저 섬 가운데 요망한 무리들은 우리 민족이 아니며 흉악한 무리로 갑자기 칼날을 휘둘러서 우리 생령을 도륙하며 우리 宗廟社稷을 불지르고 우리 先王의 능산소를 발굴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원수다. 그 한때 사는 것만 구차하게 생각하느니 차라리 만세의 綱常을 붙들어서 살아서는 마땅 히 義人이 되고 죽어서는 마땅히 義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대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 키고 충성을 다하여 行在所에 가서 죽기를 원하는 바다.” 하고 격동시켰다. 그러자 평일에 公의 德義를 사모하여 따르는 자가 날로 백여 명씩 늘어나 五百餘名이 모여들어 의병을 결성하니, 公이 의병장에 추대되고 두 아들 迪 逸도 從軍하였다. 公은 명령이 엄숙하고 軍容이 井井하여 군사들의 義氣가 충천하였다. 의병들은 여강에서 東路 軍을 방어하다 후퇴하여 고래산 敗峴에 陣을 치고, 격렬히 싸웠다. 기발하고 신비한 계책 을 내어 혹은 진지를 불태우기도 하고 혹은 遊兵을 勦殺하기도 하며 승전하였다. 적들은 형세가 꺾이고 통로가 막힐까 두려워하고 敗敵을 구원하러 사방에서 모여들어 배잔마을 일대를 포위하고 하루 종일 공격하였다. 적병은 막강한데 의병은 약하고 후방에 지원군도 없었다. 公은 대적할 방법이 없어 대세가 이미 어찌할 수 없음을 감지하였다. 義憤이 격 동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軍衆에게 맹세하기를 “오늘은 곧 우리들이 殺身成仁할 때이다” 하며 외쳤다. 이에 軍衆이 용기를 백배 내어 혈전을 거듭하였다. 公이 적을 쏘아서 죽인 것이 대단히 많았으나 힘이 다하고 화살이 떨어져 마침내 적탄에 殉國하니 五月八日 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