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page

475 데 지난달 20일 폭도 수백 명이 습격해 오니 한병은 매우 급히 무기와 피복을 버리고 도 주했으며 폭도는 그 버리고 간 물건을 수습하여 그것을 착용하고 동 현 ‘부기’ 시장을 습 격하여 제멋대로 물품을 약탈하여 죽산현(竹山縣)을 향했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죽산현 에서는 폭도 수령 4명을 잡아 일본병 또는 한병이 오는 것을 만나 크게 기뻐하였는데, 그 러자마자 가장한 폭도는 갑자기 그 현의 촌락을 공격하고 군수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이 낭패하여 도주하는 틈을 타 수령 4명을 구하고 죽산을 모두 불태우고 ‘무키요쿠’ 방위로 향하였습니다. 그 후 참령(參領) ‘최기련’은 제천의 폭도를 격퇴할 목적으로 동 26일 부하 300명을 거느리고 충주 부근에 이르고, 또 충주관찰사는 선유사로서 원주 및 제천을 향해 출발했다고 합니다. 또 이 달 1일 전선(電線) 감시를 겸하여 하물 호위를 하기 위해 하사 이하 10명이 가흥 을 출발하였다가 하담(河潭)의 남방에서 폭도 약 200명의 습격을 받고 방어 전투를 하였 습니다. 그러던 중 가흥에 있는 미야케[三宅] 대위는 그 총성을 듣고 곧바로 헌병 12명과 보병 14명을 이끌고 급히 가서 응원하였고, 동시에 충주발 전선 감시 헌병 및 보병이 이 에 합세하여 1시간 반 동안 전투하여 이를 격퇴하였습니다. 폭도는 ‘고료’ 방면으로 패주 하였는데 사상자는 상세하지 않고 우리 병사는 무사하다는 보고입니다. 이처럼 충주 부근에서는 아직도 초적(草賊)의 출몰이 여간 아닙니다. 우리 전신선(電信 線)과 같은 것은 수리하면 따라서 또 절단하는 상태로, 형세가 매우 평온하지 않지만 이 곳 부산항 부근에 이르면 앞서 보고한 바와 같이 진주 폭도가 패주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 까지 아직 다시 쳐들어올 기미도 없고 일단 평온한 상태로서 거류지 내외의 인민은 약간 안도하는 듯합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이하생략) 〔자료명〕 메이지 40년(1907년;편자 주) 7월에서 동(同) 41년(1908년;편자 주) 1월까지 한 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내용] 기수 제2231호 / 청풍(淸風), 제천(堤川)과 양근(陽根) 방면의 폭도 토벌 상황에 관한 한 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신일: 1907-08-22 수신일: 1907-08-23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