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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 심문하였으므로 거짓으로 전라도 화순에 사는 사람인데 상용(商用)으로 부산에 갔다가 지 금은 귀향하는 도중이라 대답하니 그렇다면 통행에 지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동 24일 마산포에서는 며칠 전 진주에서 폭도 40여 명이 와서 부호의 집을 침범하여 금은을 약탈 해 갔으므로 그곳 인민은 모두 그 폭도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동 25일 진주부 관하의 어 느 촌락에서 이 사람이 들은 바에 따르면, 전날 밤 관병(官兵) 500명이 진주부에 와서 일 단 척후 2명을 보내어 성벽에 올라가 폭도의 동정을 정찰하게 하니 성안은 적적하고 소 리가 나지 않으므로 선진(先陣) 200명은 곧바로 성벽을 파괴하고 성안을 향해 발포했다고 합니다. 당시 성 안에 있던 노 대장 부자와 폭도 약간 명은 남문 밖으로 도주하였고, 수 백 명의 인민은 그 포성에 놀라 성 밖에 있는 강변으로 달아나 간신히 3척의 도선(渡船) 에 올라타 막 배를 출발시키려 할 때 관병이 강변까지 쫓아와서 폭도 대장이 저 배에 있 다고 말하자마자 그 배를 향해 발포하니 배에 타고 있던 인민 등은 탄환을 피하기 위해 서로 놀라 움직이니 마침내 3척의 도선은 전복되고 인민은 모두 익사했다고 합니다. 또 관병은 경병(京兵) 500, 대구병 200, 도합 700명이었다고도 합니다. 동 29일 김해군 관하 삼거리(三巨里)에서는 서 대장이 500명의 군병을 이끌고 삼가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관병 이 의성을 함락하고 성안을 불 태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군기가 크게 꺾여 마침내 폭도 들은 서로 의논한 끝에 자신들이 서 대장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합니다. 동 30일 이 한인은 무사히 부산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또 진주에서 이곳 부산항으로 돌아온 한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사람은 경성에서 부산 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난 3월 19일 경상도 함양군을 지날 때 폭도에게 붙잡혀 진주의 본 진으로 호송되어 그곳의 옥에 11일 동안 있다가 동 30일에 이르러 갖가지 신문을 받고 마침내 방면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진주에 있는 폭도의 여러 대장은 노 대장 및 정 대장 등으로 당시 관병이 대거 진주를 습격한다는 소리를 듣고 여러 장수를 불러 도주 명 령을 전하고 4월 12일까지 모두 병기와 양식 등을 짊어지고 삼가 지방으로 퇴각하였습니 다. 다만 노 대장만이 겨우 5, 60명의 병졸을 이끌고 진주에 머물러 진을 치고 관병이 오 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관병이 진주를 점령할 때 성안에는 겨우 노 대장과 약간의 군졸만 있었을 뿐인데 저들은 재빨리 도주하였고 당시 관병에게 살상된 자 대부분은 양민 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진주의 폭도는 관병이 토벌하러 오는 것을 알고 잠시 자 취를 감춘 것에 지나지 않고 관병이 진주를 떠나자 폭도는 다시 모여들 것은 필연적인 일 이 아닌가 합니다. 동 5월 7일 재 부산 사카타 영사관 사무대리의 보고 충청도 가흥 통신소에서 이곳 부산항 통신부로 보낸 보고에 따르면, 경기도 양지(陽智) 현리(縣吏)는 동 현을 보호하기 위해 미리 조선 정부로부터 한병(韓兵) 30명을 빌려 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