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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라. 정응린(鄭應麟) 〔F자료壬11: 『하동정씨종보』 제8호, 2012, 50~51쪽ㆍ장삼현, 『아름다운 삶이 있는 양평 사람들』, 상촌장학회, 2013, 230~231쪽ㆍ『백운문화』 제29호, 양평문화원, 2012, 131~134쪽ㆍ여주시사(www.yeoju.go.kr/history/)〕 『하동정씨종보』 제8호, 2012, 50~51쪽 (앞부분 생략) 고려충신(高麗忠臣) 두문동 72현으로 대제학(大提學)과 좌찬성(左贊成)을 증직 받으신 포 은선생(圃隱先生)의 고제 묵은 정희(高弟 黙隱 鄭熙)의 6대손으로 단종절신(端宗節臣)으로 단종의 세자(世子) 익위사 익찬(翊贊)이었던 죽은 정화(竹隱 鄭椛)의 증손(曾孫)이며, 율곡 선생과 우계선생과 도의지교(道義之交)였던 옥야 정여처(玉野 鄭如處)의 아들로 무과(武 科)에 급제 후 훈련은(訓練隱) 부정(副正)과 후사관(後事官)으로 광국공신 원종공신(光國功 臣 原從功臣)이 되고 함평(咸平)현감 재직 중 부친(父親)상을 당하여 1591년 여주에서 여 묘를 살고 있었다. 다음해 임진년에 왜적이 동해바다를 건너와 국토를 황폐화시키며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선조대왕이 의주로 몽진하고 백성들은 급한 상태에 빠지자, 여주에서 창의호국의 결단으 로 의병 500명을 모집하여 지평면 대평리(패현)에서 왜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 로 마침내 전사하여 순국하였다. 정응린이 500의병과 격전을 벌이고 의병들과 함께 전사한 고개의 지명(地名)이 패현(敗 峴)이라 부른 것은 뒷날 그 곳 사람들이 의병들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지은 지명 (地名)이고 그 옆의 계천이 혈천(血川)으로 불리어지니 이것은 의병들의 피가 흘러 피로 계천이 붉게 흘렀다하여 지금까지 이름이 남아 있다. 맏며느리 청풍김씨와 넷째아들 정일 (鄭逸)도 함께 순절하였으니 5월 8일이다. 종군하였던 장자 정적(鄭迪)은 군량미충당을 위 해 외지에 나갔다가 화를 면하였고, 비보를 듣고 돌아와 적진에 들어가 주검을 거두어 여 주 흥천면 상백리에 안장하고 그 슬픔과 예제를 다하였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