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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람의 남자와 부인 1사람, 그리고 어린아이 하나를 남겨 놓고 갔는데 이들은 모두 화염에 타 죽어 버렸다.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더운 초가을이었다. 제천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산등성이에 는 일장기(旗)가 눈부신 햇빛으로 선명했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도 반사하여 번쩍이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거리로 나가 잿더미 위를 걸었다. 일찍이 나는 이렇게 처참한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분주하고 부유하던 도시가 지금은 검고 회색의 먼 지와 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온전한 담벽 하나도, 대들보도, 깨지지 않은 항아리 하 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에 그래도 뭔가 쓸 만한 것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잿더 미 속을 뒤지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헛수고였다. 제천은 지도 상에서 사라진 거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에게 물었다. “당신의 가족은 어디 있습니까?” “산등성에 숨어 있습니다.” 그들의 대답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의병을 1명도 만나 보지 못했으며 일본 군인도 몇 명밖에 보지 못했다. 내가 일본인을 만난 것은 어제 충주에서였다. 내가 충주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 그 도시의 성곽이 무너져 있음을 보았다. 충주로 들어가는 성문(城門)의 석조(石造) 아치만이 남아 있을 뿐, 성문과 성곽은 사라지고 없었다. 일본인 보초와 헌병이 문에 서서 나를 심문했 다. 여기에는 일단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 지방의 작전 지시는 분명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나는 곧 이곳의 책임자인 일본군 대좌를 만났다. 이 지방의 관아(官衙)에 있는 그의 방 은 어디를 보아도 일본인들이 이 작전을 얼마나 철저하게 실행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빨간 연필로 표시가 된 커다란 전략 지도는 점령하고 있는 작전 지역을 표시한 것이었다. 분명히 지휘관용인 듯한 지도가 들어 있는 조그마한 책자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대좌는 나를 공손하게 맞아들였다. 그러나 내가 온 데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그 가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대자들은 한갓 도둑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가 볼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있을 여러 가지 위험한 사태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경 고를 해 줬다. 그리고 그는 친절하게 일본의 계획은 의병들을 포위하여 양측에서 2개의 부대가 작전을 벌여 소요(騷擾) 지역을 완전히 봉쇄해 버리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면 한국 의병들을 중심부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좌가 보여 준 지도에서 바로 내가 의병을 만나기 위해서 가야 할 방향을 알았다. 언뜻 지도를 보니 일본인은 아직도 제천과 원주 사이를 점령하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한 국인 의병을 만나려면 바로 이곳에 가야 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나는 제천의 파괴상을 눈 여겨보고 말머리를 원주 쪽으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