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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 고 달려왔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장로들은 말을 계속했다. “눈앞에는 군인이 총검을 갖고 서 있었으니 말입니다.” 나중에 나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또 듣게 되었다. 그 이야기들은 그 자리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내가 판단하건대 그러한 부녀자 강간 사건은 많지는 않았으며 극히 소수의 군인들의 소행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러나 소수에 비해 엄청난 큰 결과를 가져왔다. 한 국인은 여자의 정결을 각별히 소중히 여기고 있는 터라 비교적 얼마 안 되는 이런 난폭한 짓은 주민들에게 두려움을 조성하여 떼를 지어 산속으로 달아나게 한 것이다. 마을을 불태울 때에 많은 한국 부인네와 어린애들이 사살된 것만은 확실했다. 일본 군대 는 대개의 경우 집을 불살라 버리기에 앞서 혹시 집 주위에 폭도들이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왈칵 마을로 달려들어와 무차별 사격을 자행했던 것 같았다. 2채의 가옥이 아직 도 남아 있는 한 촌락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이 2채의 집은 일본군이 그 집의 주인의 10 살 되는 딸을 쏴 죽였기 때문에 집을 그대로 놔두었다고 말해 줬다. “일본 군인이 그 어린애를 쏴 죽였을 때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일본 군인들에게 다가가 ‘이 사람의 딸을 죽였으니 제발 이 집만은 불태우지 마오.’하고 말했더니 그 일본 군인들 은 우리의 청을 들어 주더군요.” 라고 마을 사람들은 말했다. 충주나 원주 같은 도시에는 여자·어린애, 그리고 부유층 가족들은 거의 벌써 피난을 가 고 없었다. 상점들의 문은 닫혀 있었고, 주인들이 떠나기 전에 방책(防柵)으로 앞을 막아 놓았으나 일본 군인들이 부수고 약탈을 해 갔다. 제천의 그것에 비하면 딴 도시의 파괴상 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천은 문자 그대로 완전히 폐허로 되었던 것이다. 제천은 금년의 늦여름까지만 하더라도 2~3천의 인구를 가졌으며,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평야에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는 중요한 농촌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영국의 휴양지 바아드(Bath)나 첼튼험(Cheltenham)에 해당되는 고급 관리들이 자주 찾는 휴양지였다. 집들은 대개 컸으며 기와집도 있었는데 이것은 부(富)의 단적인 표 시이기도 하다. 의병이 작전을 개시했을 때 그 일부가 제천 건너편의 산을 점령했다. 일본은 소수의 일 본군을 제천으로 투입시켰다. 그런데 어느 날 밤 3면에서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몇 명은 죽고 나머지는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은 증원군을 보내어 싸움을 벌인 끝에 전날의 패배를 보복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제천을 불태움으로써 인근 부락에 본때를 보여 주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 도시를 불살랐다. 일본 군인들은 용의주도하게 불 길을 조정하면서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모두 불살라 버렸다. 하나의 불상(佛像)과 군(郡) 의 관아(官衙)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태워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도망갈 때 부상당한 5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