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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 으로 삼고 있는 도이므로, 족보를 없애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들을 공격하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벌의 방법을 보고서 내가 느낀 바는 마을 사람들이 겪는 수난보다도 일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처사가 아 주 무익하다는 점이었다. 한국인을 무마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수백 세대(世帶)의 조용한 가족들을 반란군으로 전환시키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최소한도로 하나의 읍(邑)과 수없이 많은 마을이 이와 같은 수난 에 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일본인은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것일까? 마을 사람들은 분 명히 일본군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었다. 그들은 다만 조용히 자신의 일만을 보살피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전부였던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을 회유하여 그들의 우정적 태도와 협조를 바라고 있다고 공언하고 있었다. 내가 본 적어도 한 지방에서는 방 화(放火) 정책이 부유한 한 마을을 잿더미로 변하게 했으며, 반란군의 세력을 증가시켰으 며, 씻어버리려면 몇 세대가 걸릴지도 모를 지독한 원한의 씨앗을 뿌려 놓고 말았다. 우리 일행은 잿더미가 된 마을과 촌락들을 목격하면서 여행을 계속했다. 내가 본 사람들 의 태도로 보아 나는 일본의 위력이 그들 마을에도 가차 없이 행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나무를 지고 가는 소년을 만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급히 길 가로 비켜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몇 채의 가옥이 남아 있는 어느 마을을 지나가게 되 었다. 내가 가까이 가니까 부인네들은 황급히 도망해 버렸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그들이 왜 도망갔는지를 알았다. 물론 그 부인네들은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가는 곳마다 나는 일본인들이 불 지르지 않은 곳에서는 약탈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동 네 노인네들은 일본 군인이 도둑질을 하려고 할 때 반항하려고 했기 때문에 호되게 매를 맞은 노인 하나를 나한테 데려오곤 했다. 그 다음에는 전보다 더 어두운 얘기가 들려왔 다. 서울에 있을 때 나는 이런 얘기들을 일소에 붙여 버렸었다. 그러나 이제 그 희생자들 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그날 오후 우리 일행은 바로 이천에 도착했다. 상당히 큰 도시였지만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개가 일본인을 피해 산중으로 피난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이제는 사용하지도 않 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교사(校舍)에서 잤다. 벽에는 만화, 동물의 그림, 그리고 경건 한 급훈(級訓)과 교훈(校訓)들이 붙어 있었지만 어린애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보통 때면 북적대는 장터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사람의 그림자라곤 하나도 없었다. 나는 길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당신네 여자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또 어린애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먼 하늘에 솟아 있는 높은 나무가 하나도 없는 벌건 산을 가리키며, “그들은 저기에 있지요. 여기에서 욕을 당하느니보다 불모의 산기슭에 숨어 있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