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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 “말을 빨리 끌어내” 하면서 그 마부는 서둘러댔다. 딴 마부는 그의 갑자기 변한 태도에 어리둥절했으나, 그의 말을 좇아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밤이 되면 기록적인 하루의 강행군을 마 치고 말을 끌어들이면서 고개를 들어 험상궂은 미소를 짓곤 했다. 그의 미소는 이만하면 약속된 대가를 받을 만한 것이 아니냐는 듯한 의미 있는 미소였다. 일본의 무차별 탄압, 내가 서울을 떠나기 직전, 이등(伊藤) 공작의 측근(側近)인 한 일본 요인(要人)은 나에게, “이 사람들에게는 일본의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동부(東部) 산악 지대의 한국인들은 일본 군인을 아주 보지 못했거나 봤어도 몇 명밖에 보지 못해서 우리의 힘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본때를 보여 줘야지.” 하며 덧붙였다. 나는 이천(利川)으로 통하는 골짜기를 바라보며 이 친구의 위와 같은 말을 회상했다. ‘일 본의 따끔한 맛’이 분명히 이곳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내 눈으로 잿더미로 변해 버린 마을들을 수없이 보았다. 나는 이들 재로 변한 마을 중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로 내려갔다. 그 마을은 불타기 전에 는 70~80가옥이 들어선 꽤 큰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1채의 집도, 집의 벽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김장독들은 다 깨졌고 화로조차도 산산 조각이 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잿더미로 된 자기 마을로 돌아와 다시 세우고 있었다. 우선 그들은 임시로 움막을 짚으로 만들어 임시로 거처할 곳을 만들어 놓았다. 젊은이들은 산에서 나 무를 베고 있었으며, 기타 사람들은 열심히 집을 짓고 있었다. 농작물은 벌써 수확할 때 가 되었으나 일손이 부족해서 못 거둬들이고 있었다. 우선 잠잘 곳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었다. 그 후 며칠 동안은 이러한 광경을 하도 자주 봐서 슬프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집을 빼앗기고 갈 곳이 없게 된 이 사람들을 보고 측은한 마음으로 꽉 차 있었다. 한국의 노인들이 다 그렇듯이 덕이 있고 위엄이 있는 노인들, 대부분이 젖먹이 어린아기를 앞가 슴에서 젖을 빨리고 있는 젊은 주부들, 건장한 젊은 장정들, 이러한 사람들이 정말로 깨 끗하고 평화스러운 공동 사회를 이루어 왔었다. 내가 쉴 수 있는 집이라고는 없었으므로 나무 밑에 앉아 있었고, 김민근군은 내 저녁 식 사를 짓고 있었다. 이때 마을의 촌로(村老)들이 와 그들의 슬픈 사연을 이야기했다. 이곳 에서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즉, 대개의 한국 여자는 수줍어하고 조심스러워 낮선 사 람의 앞에서는 별로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처럼 자유로이 그들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커다란 재난이 그들의 침묵의 장벽을 무너뜨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