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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 여 샛길을 골라서 갔다. 서울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도착한 시골은 내가 일찍이 한국에서 본 적이 없는 근면 과 번영의 평야지방이었다. 약간 황량한 산맥과 쭉 뻗어 있는 모래밭의 사이에 수없이 많 은 번영한 마을들이 눈에 띄었다. 산등성이까지 쓸 만한 땅은 모두 잘 경작되어 있었는 데, 눈앞에는 수확기에 접어든 목화밭이 뻗어 있고 또 한편으로는 하얀 꽃으로 덮인 널따 란 모밀밭이 퍼져 있었다. 2가지 주요 농작물은 쌀과 보리인데, 온 들판이 벼와 기장의 황금물결로 가득 차 있었다. 마을 근처에는 장식으로 전시라도 해 놓은 듯이 빨간 고추 밭·콩밭·깨밭들이 멋있게 흩어져 있고, 그 사이에 12~13피트가 실히 됨직한 수수가 치솟 아 있기도 했다. 밭 가운데에는 2층의 짚으로 만든 원두막이 있는데 여기에서 몇 개의 헝겊 조각을 드리 운 줄이 사면팔방으로 뻗쳐 있었다. 두 머슴아이가 제각기 원두막의 2층에 앉아서 줄을 당기어 줄에 붙은 헝겊을 흔들어 대고 거친 소리를 내어 곡식을 쪼아 먹는 새들을 쫓고 있었다. 정말 이 마을들은 미와 평화를 여실히 상징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막대기와 짚으 로 엮어진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울타리의 입구에 우상[주 : 장승]이 서 있는 마을이 더러 있었으나 이미 우상들을 없애 버린 마을도 많았다. 이 우상이란 6~8피트의 굵은 나 무토막의 윗부분은 대개 추악한 인간의 형상인데, 주홍색과 녹색 칠을 한 천하대장군(天 下大將軍)과 여장군(女將軍)이다. 이것을 세워 놓으면 악귀(惡鬼)를 물리친다고 믿고 있다. 진흙벽의 낮은 초가집들은 연중(年中) 이때가 가장 돋보였다. 화려한 화초들이 주위에 피어 있고, 박과 호박이 익어 육중하게 담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또 지붕 위에는 선명한 빨간 색깔의 고추가 널려 있었다. 고추는 이때쯤이면 거두어들여 지붕에 널어 말리는 것 이다. 마당에는 판자에 호박과 무를 짧게 썰어서 겨울에 먹으려고 말리고 있었다. 집집마 다 마당에는 새해에 먹을 여러 종류의 푸성귀를 담근 4~6피트의 항아리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전에 충청도가 한국의 이탈리아라는 말을 많이 들은 일이 있으나, 정말로 번창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을 깨달았다. 더럽고 무감각한 서울과는 놀랄 만한 대조를 이루는 곳이었다. 들에는 젊은 여인들이 떼 를 지어 비지땀을 흘리며 김을 매거나 추수하는가 하면, 젊은 남자들은 산등성이에서 나 무(시초)를 베며, 가장(家長)은 가을갈이(秋耕)를 하고 어린애들은 새를 쫓고 있었다. 집에 서는 주부가 어린애를 보살피기에 바쁘고, 약초와 용품을 마련하기에 분주한 일손을 놀리 고 있었다. 심지어 노인네까지도 짚그릇 만들기 같은 가벼운 일에 손길이 바빴다. 모든 사람이 부유하고 바쁘고 행복한 것 같았다. 가난의 빛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 었다. 의병들의 봉기는 극히 가벼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고장을 휩쓸지는 않았다. 봉기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물어 볼 때마다 나는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일본인은 이천(利川)에 와서 많은 마을을 불살라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