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page

449 한국 군대에서 훈련된 지휘관들이 이들을 훈련시켜 자위대로 조직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이 접전 지역에 속속 군대를 투입하고 있었으나, 의병들은 교묘 한 봉화신호(烽火信號) 방법으로 일본군 주력(主力)을 잘 피해 일본군의 투입되지 않은 무 방비 지역만을 골라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보도에 의하면, 의병들의 무기는 보잘 것 없는데다가 탄약도 부족했고, 또한 외부로부터 무기를 보내 주는 효과적인 조직체도 없었 던 것 같다. 일정(日政)에 불만을 품은 한국인이 규합한 최초의 장소는 서울 동부 80~90마일 떨어진 산악 지대였다. 그곳에는 한국에서 유명한 호랑이 사냥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의병이라는 이름 아래 한데 뭉쳐, 일본군 소부대와 접전, 약간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상당한 수의 일본 증원군이 도착하자 이 의병들은 산속으로 깊숙이 후퇴해 버렸다. 산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호랑이 사냥꾼들은 원래 용감한데다가 싸움터의 지리를 잘 알 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잘 훈련된 정규군이라 할지라도 좀처럼 당해 내기 힘든 적수로 생 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마도 이들은 세계에서도 가장 용맹스러운 사냥꾼일지도 모 르며 또한 의병 중에서 가장 멋있고 낭만적인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무기는 총신(銃身)이 길고 7~8인치의 놋쇠 방아쇠가 달린 구식 격발총뿐이었다. 그들의 사격 방법은 견착(肩着) 사격식이 아니고 돌격시의 자세와 비슷하게 총을 허리 정도의 높이에서 발사하지만 실수하는 일이 없다. 탄약 재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1 번에 1발밖에는 사격할 수 없다. 그들은 호랑이 사냥을 할 때 몰래 접근하여 아주 단거리 에서 단발에 호랑이를 잡도록 훈련되어 있던 것이다. 오늘날 산악에서 호랑이를 사냥하는 사냥꾼 치고 호랑이를 명중시키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단번에 쏴 죽이지 못하면 곧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랑이가 사정없이 달려들어 오히려 호랑이에게 잡 아먹히게 되기 때문이다. 서울에 들어오고 있는 의병들의 승리에 대한 소문은 아무리 해도 믿을 만한 것이 못 되 었다. 그러나 어떤 싸움에 대한 이야기는 관련성이 없는 많은 소식통을 거쳐 내 귀에 들어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는 얘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싸움은 티롤 지방의 주민들이 나폴레옹과 대항해서 싸울 때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48명으로 구성된 일본 군인이 초소에서 초소로 물자를 호송하고 있었다. 이때 한국인들은 양쪽에 가파로운 절벽으로 둘러싸인 계곡에 복병(伏兵)을 숨겨 두고 있었다. 일본군이 계곡의 한가운데쯤 왔을 때 그들은 산꼭대기로부터 큰 돌의 세례를 받았으며, 나머지 생존자들이 재집결하기 도 전에 1떼의 한국인들이 급습하여 모두 사살해 버렸다. 의병 측에서 나온 선언문들이 수도 서울로 몰래 스며들었다. 일본군은 서울의 본거지인 진고개에서 줄곧 지방으로 투입되고 있었다. 이때에 장곡천(長谷川) 장군이 성명서를 발 표했는데, 이것은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잘 말해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