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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 (45) 융희 2년 5월 30일. 포천 주재 순사 미택(尾澤龜太郞)은 한인 순사 2명을 인솔하고 그곳 수비대와 함께 동촌 면(東村面) 지방을 정찰 중에 마근담리(麻根潭里)의 남쪽 끝에서 약 1백 명의 폭도를 만 나 교전 약 20분 후에 내동면(內洞面) 내동(內洞) 방면으로 패주시켜 금수산(金壽山) 기슭 까지 추격하였으나 결국 종적을 잃고 다음 31일 오후 1시에 돌아왔다. (46) 융희 2년 6월 8일. 부평(富平) 주재 순사 3명 및 수비대 13명은 부평군 내면(內面)에 내습한 폭도 21명을 공격하여 그중 4명을 생포하고 총기 9정 외에 잡품 수십 점을 노획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이 입은 타격은 매우 큰 것으로서 수괴 정용대(鄭容大)의 부하는 전부 지 리멸렬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당분간 재기할 수 없는 상태인 것으로 보였다. (47) 융희 2년 6월 12일. 양천군(陽川郡) 주재 순사 3명은 적을 추적, 수사 결과 수괴 김창돌 외에 7명을 체포하 고 대타격을 주었다. 김창돌은 그 해 3월 이후 김포·고양의 각군에 출몰하여 방화·강도 기타의 흉행이 십수 회에 걸쳤다고 한다. (48) 융회 2년 6월 22일 오후 1시. 폭도 약 1백 명이 포천읍을 습격한다고 장담하면서 청원면(淸原面) 고금리(古琴里)에 집 합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그곳 주재 순사 북촌(北村憲亮)은 즉시 장거리(場巨里)에 있 는 수비대에게 연락 통달하고 순사 미택(尾澤龜太郞)·유근직(柳根直)의 2명을 인솔하고 출 발 도중 궁기(宮崎) 중위가 인솔하는 1개 소대와 합류하여, 그날 오후 2시 고금리의 북방 (北方) 고지에 적을 영격(迎擊)하여 격전 3시간 만에 폭도는 수왕 산중으로 도주하여 종적 을 감추었다. 폭도는 이 전투에서 수왕 산중에 시체 14를 유기한 것을 확인하였다. 부상자는 확실치 않으나 원주민의 전하는 바로는 약 20명을 넘을 것이라고 하였다. (49) 융희 2년 7월 1일. 풍덕군 상조서리(上祖西里)에 수십 명의 적도가 내습하여 금품을 약탈하려는 것을 탐지 한 순사대는 즉시 습격하여 14명을 죽이고 10명을 부상시켰으며 양총 7정, 화승총 4정, 권총 1정, 군도 1자루, 화약 및 잡품 약간을 노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