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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 (12) 융희 원년 9월 22일. 보좌관보(補佐官補) 주본(酒本勇四郞) 이하 보조원 4명은 중원(中原)정찰대와 함께 굴암 (屈巖)에 있는 폭도 2백여 명을 공격하여 적의 척후 9명을 전멸시키고 적의 진지에 돌입 하였다. 적은 급격한 돌격에 극도로 낭패하여 시체 5를 유기하고 죽산·안성 방면으로 궤 주(潰走)하였다. 한편 추격을 계속하여 적의 의지했던 부락을 불태우고 격전 수시간, 적은 사망자 15를 유기하고 궤주하였다. 그날 오후 4시 수괴 전봉기(全鳳基)의 부하 약 2백 명이 여주 읍내 를 습격하여 동장(洞長) 노만실(盧萬室)을 살해하고 돌아갔다. (13) 융희 원년 9월 23일. 가평군 읍내에 폭도 약 15명이 내습하여 한인(韓人) 우편 체송 인부 1명을 납치하여 명 현(明峴)에서 총살하였다. (14) 융희 원년 9월 27일. 포천분파소로부터 30리 거리의 가평군 현등산(懸燈山)에 폭도 약 1백50명 집단이 있다 는 보고를 듣고 주재 순검 유근직(柳根直)은 수비대의 지리 안내로서 그곳에 출장, 교전 약 1시간에 적을 가평 방면에 궤주시켰다. (15) 융희 원년 9월 28일 오전 7시. 전봉기(全鳳基) 및 한성관(韓聖寬)의 부하 약 2백50명이 여주 읍내에 내습, 당시 전변(田 邊) 대위가 인솔하는 1백50명의 군대는 전날 밤부터 숙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3방면 으로 전개 포위 공격을 시작하여 적은 시체 6기를 유기하고 궤란했다. (16) 융희 원년 9월 30일 오후 2시. 폭도 30명이 영평(永平)분파소를 습격하여 순검 김도길(金道吉)·김종업(金鍾業)·김공리(金 公利) 등 3명을 포박하고 살해하려던 차에 영평군(永平郡) 주사(主事) 등의 애원에 의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대검(帶劍)을 빼앗고 다시 광정리(廣井里)에 도착하여 그곳에 거주 하는 나선봉(羅先奉)이란 자를 납치하여 가평 방면으로 퇴거하였다. (17) 융희 원년 11월 6일 오후 3시. 보좌관보(補佐官補) 무전(武田不二友郞)은 보조원 전(畑爲治)·송본(松本益吉)·중곡(中谷伊 助)·중촌(中村善助)의 4명을 인솔하고 중야(中野) 보병 중위와 토벌을 위하여 포천에 도 착, 그로 수비대장 궁기(宮崎) 중위와 함께 포천(抱川)으로부터 40리 떨어진 양주 광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