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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 공격하였다. 때마침 보좌관보(補佐官補) 소송직지진(小松直之進)은 관내 순시에 나가 부재 중이었으며, 당시 당직 경비의 책임을 맡은 것은 보조원(補助員) 송촌미시(松村彌市)·좌등 성인(佐藤盛人)·통정좌조(筒井佐助) 및 총순(總巡) 이완규(李完圭) 이하 순검 8명은 즉시 이에 응전하여 분투하였으나, 폭도의 공격은 더욱 급박하여 탄환이 비 오듯 서내에 쏟아 져 마침내 좌등 보조원은 두부(頭部) 관통으로 그 자리에 쓰러지고, 이어 송촌 보조원 또 한 복부 맹관상을, 그리고 통정 보조원은 두부에 찰과상을 입었다. 그리고 서내 한 구석 에는 소송(小松) 보좌관보 이하 순사의 처자식 7명이 난을 피하고자 초조히 겁내어 생사 (生死)가 찰나지경에 박두하여, 처절 참절 진퇴유곡에 빠지자, 송촌 보조원은 분연히 통정 보조원을 격려하고 처자식을 부축하여 피난시키고, 상처에 띠로 붕대를 하고 죽을 힘을 다하여 방전(防戰)을 하였으나 마침내 폭도의 독수(毒手)에 쓰러졌다. 이에 앞서 통정 보조원은 송촌 보조원의 격려를 받아 7명의 부녀를 동반하고 분투 역전 하였으나, 적의 저항 더욱 완강하여 송촌·연상(淵上)의 양 보조원의 처(妻)는 도중에서 적 탄에 쓰러지고 소송 보조관보의 첩(妾) 및 축산(築山)·부영(富永) 양 보조원의 처는 한인 홍익삼(洪益三)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겨우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통정 순사는 정신(挺身)하여 사경(死境)을 탈출하여 양지(陽智)에 돌아오게 되었다. 이날 보조원 원용태랑(原龍太郞)은 원주(原州)로 돌아오는 길에 여주군 근동면(近東面) 단강(丹江)에서 동민(洞民)에게 포위 참살당했다. (2) 융희 원년 8월 15일 오후 2시. 수괴 전봉기(全鳳基)의 부하 80여 명이 음죽군(陰竹郡) 순사 분파소를 습격하고 순검 3 명을 격퇴하고 가옥·기물을 파괴하였다. (3) 융희 원년 8월 17일 오전 10시. 수괴 불명의 폭도 약 50명이 양근(楊根) 읍내를 습격하고 우편 취급소를 파괴하고 돌아 갔다. 당시 일본인은 이미 피난하였으므로 피해가 없다고 한다. (4) 융희 원년 8일 18일 오전 11시. 수괴 방인관(方仁寬)의 부하 1백여 명이 장호원(長湖院)을 습격하였는데 마침 제천 방면 을 향해 행진 중인 일본 군대와 만나 약 1시간에 걸쳐 격전을 벌인 후 적도는 궤란 도주 하였다. 이 전투에서 피차간에 사상은 없었으나 일군의 화물을 운반 중이던 한국인 인부 1명이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