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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 하였고, 또 소수의 화적이 때때로 출몰하여 동민을 협박하고 금품을 겁탈하는 자도 있으 나 폭도라고 인증할 만한 것은 없다, 5월에 이르러 적도는 더욱 위축 쇠퇴하여 다시 일어날 힘은 없는 것으로 보이며, 질서 회복의 시기도 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6월로부터 8월에 이르는 사이에는 광주군(廣州郡)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평온한 상태로 돌아갔다. (2) 인천(仁川)경찰서 관내 융희(隆熙) 원년(元年) 8월 9일 강화도 진위대장 이동휘(李東輝)는 시국에 관한 유언비어 에 사주되어 영내(營內)의 한병(韓兵)을 인솔하고 돌연히 지방 폭민(暴民)과 함께 모반(謀 叛)하여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 순사를 살해하고 거의 동도(同島)를 석권하는 기세 로써 난폭을 감행하고, 군수도 살해당하는 등 폭상(暴狀)이 한이 없었다. 그러던 때에 그 폭도를 토벌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향한 일본 군대도 그의 지리(地利)에 의거한 완강한 저항을 받아 사상자 수명을 냈다. 그러나 도저히 일본군에게 대적할 수 없 는 오합지졸이었으므로 마침내 격퇴 당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당은 의연히 그 섬을 중심으로 하여 남양군(南陽郡) 연안의 여러 섬에 출몰 횡행하고, 9월에는 폭도가 사 방에 봉기하여 10월에 접어들자 그 기세는 창궐을 극하고, 더욱이 ‘바람 소리를 학(鶴)의 우는 소리’로 유언비어가 떠돌았고, 또 번번이 훤전(喧傳)함으로서 일반의 인심이 동요되 고, 걸핏하면 반항할 기미가 없지 않았으나, 군대·경찰의 주도면밀한 정찰 토벌 때문에 적 도는 큰 타격을 입고 인민도 진정(鎭靜)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육지의 적도는 한때 귀순한 듯하였으나, 그들 방향을 해상으로 돌려 폭행을 함부 로 자행하고 어선을 빼앗아 연안을 위협하였다. 이 때문에 일한(日韓) 양민들로서 참해(慘 害)를 입는 자가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작년 10월 이후 융희 2년 8월 말에 있어서의 피해 건수 1백여 건의 많은 수에 달했으며, 경찰·헌병 등의 누차의 토벌에도 만족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동년(同年) 8월에 군함 천조(千早) 및 수뢰정(水雷艇) 3척이 내항(來港)하여, 이래 전력을 다하여 해 적 토벌과 연안 경비에 노력한 결과 적도는 궤산하고 마침내 그 형적을 볼 수 없게 되었 다. (3) 여주경찰서 관내 융희 원년 8월 12일 이구채(李九彩)가 여주경무분견소(警務分遣所)에 내습하여 일본경찰 관을 해친 이래 11월까지는 적세(賊勢)가 가장 극성하였던 시기로서, 여주군내는 물론 지 평군 삼산리(三山里)에는 대소 폭도 수괴 12명이 집합 부대 약 3천 명을 인솔하고 의기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