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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 3. 적상성쇠(賊狀盛衰)의 개황(槪況) 및 출몰 구역과 그 일시(日時) (1) 수원경찰서 관내 경성(京城)에 있어서의 정변(政變) 소식이 일단 지방에 훤전(喧傳)되자 우매한 인민은 불안위구(不安危惧)에 싸여 세상이 소연(騷然)하고 민심의 동요를 일으켜 형세는 시시각각 으로 불온의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시기에 안성청년회장(安城靑年會長) 강태영(姜泰鑅)은 비분강개하여 격렬한 대로 (大路) 연설을 하여 어리석은 민심을 선동하고 또 결사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격문을 사방 으로 통하게 하여 무리를 모으기에 힘썼다. 과연 7월 하순 의병이라고 칭하는 일단은 용 인(龍仁)·진위(振威)의 2군(郡)에서 총기(銃器)를 약탈하고 점차 소요를 일으키기에 이르렀 다. 8월 12일 전주의병(全州義兵)이라 칭하는 적도(賊徒) 50여 명이 죽산군(竹山郡) 백암시 장(白巖市場)에 나타나 일본인 1명을 총살하였다. 이로써 적도의 기세가 갑자기 올라 이 에 호응하여 각도에서 적도가 패연히 봉기하여 3,4백의 대단, 20~30의 소단(小團)이 빈번 히 용인·죽산·안성 등의 군내 각처에 출몰 횡행하기에 이르렀다. 9월 상순부터 돌연히 적 도는 공세를 취하여 군대에 항전하고, 혹은 경찰관을 습격하여 군아(郡衙)를 위협하고 군 수(郡守)를 참살하며, 일본인을 학살하고 일진회원(一進會員)을 도륙하며, 더욱이 동민(洞 民)을 협박 난타(亂打)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발호 도량을 자행하여 죽산·용인·광주·안 성 및 양성(陽城) 등은 완전히 폭도가 유린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따라 질서는 문란하여 지고 그 참담한 상황은 말할 수 없다. 물론 군대 및 경찰관이 주도 엄밀한 정찰 토벌을 계속 감행하여 다소의 타격을 가하기는 하였으나, 그 배치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지리(地理)에 정통한 적도는 숨고 나타나는 일이 자유자재하여 토벌의 공을 일거에 거둘 수 없음은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9월은 적도의 세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10월에 접어들어 적도의 세력은 의연히 쇠퇴하지 않고 죽산·광주·용인 등을 발호 횡행하 고, 다시 양지군(陽智郡)의 일부 및 수원군의 남부에 침입하여 살육을 함부로 하였으나, 군대의 배치가 다소 많았고 경찰관이 열심히 토벌한 결과 수괴자를 토륙(討戮) 또는 포박 하였다. 이로써 부하의 무리는 도망하고 숨거나 또는 흩어져 11월 이후로는 적도의 기세 가 눈에 띄게 좌절되어 용인·광주·수원군의 남부 및 양지군의 일부에 출몰 배회하는 형적 이 있을 뿐 거의 지난날의 의기를 갖고 있지 않다. 이후로는 교묘하게 토벌대의 예봉(銳鋒)을 피하여 때로는 도리어 그 빈틈을 엿보아 양민 (良民)으로부터 금전·곡물·재물을 약탈하는 날치기, 화적(火賊)의 정체를 나타내기도 하였 다. 융희 2년 3월에 이르러 추위가 풀림에 따라 이미 진정된 죽산군에서 다시 적도가 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