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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2. 임진왜란기의 양평의병 가. 구미포의 임진의병 〔F자료壬4: 『양평의향지』, 양평군, 2000, 60~61쪽〕 선조(宣祖) 25년(1592) 일본은 158,000명의 병력(兵力)을 동원하여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인솔한 제1번대 18,700명이 700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4월 14일 오전 8시 대포정(大浦 頂)을 떠나 오후 5시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그날로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하여 정발(鄭 撥) 부산진(釜山鎭)참사가 이끄는 아군(我軍)과 전투를 하니 아군이 패하고 정발참사는 전 사하는 첫 번째 전투를 치렀다. 왜군(倭軍)이 침입하였다는 보고가 조정에 알려지자 이일(李鎰)과 신립(申砬) 두 장군(將 軍)을 보내어 방어하라 하였는데 이일은 상주(尙州)에서 신립은 충주(忠州)에서 패하니 왜 군은 서울을 향하여 왔는데 여주(驪州)에 이르러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부대가 신륵사 에 진을 치고 대항하니 왜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는데 강원도 관찰사 유영길(柳永 吉)은 원호에게 강원도만 수호하라고 하니 원호부대는 철수하였다. 이에 왜군은 강을 건 너 양평을 지나 양수리에서 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하였다. 양평은 적의 주력부대가 통과 하게 되며 약탈, 방화, 인명살상 등 행위를 자행하니 그 참상은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모리길성(毛利吉成)부대 3000명을 원주(原州)에 파견하여 강원도 를 지키게 하였는데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살인, 약탈, 방화, 능욕을 일과로 삼았다. 임진년 6월 10일경 구미포(龜尾浦:현 개군면 구미리)에 들어와서 가재를 약탈하고 군량 과 마량을 강제로 조달하고 있다는 소식이 경기 강원 양도 방어사 원호(京畿 江原 兩道 防禦伺 元豪)에게 전달되었다. 원호부대는 곧 출동하여 안개가 낀 새벽에 부락에 접근하 여 적의 척후를 만나 급습하고 이들을 모조리 포로로 하였다. 곧이어 적의 본부를 급습하 니 창고에 갇혀 있던 주민들이 곧 도끼와 곤장을 갖고 원호군과 합세하여 적을 모조리 섬 멸하였다. 빼앗겼던 재화를 다시 돌려주니 의병(義兵)에 종군하는 사람이 많았다. 뒤에 패 보(敗報)를 접한 모리길성은 곧 주력부대를 이끌고 출동하였으나 원호의 기습작전에 놀라 퇴각하였다. 이후 한강 수백 리 사이에 적이 출몰하지 못하였으니 개군면주민(介軍面住 民)과 아군(我軍)이 합세(合勢)한 빛나는 승리였다. 의주(義州)로 피난한 선조(宣祖)는 명 (明)에 원군을 청하여 이여송(명나라 장군)이 5만 명군(明軍)을 이끌고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하하여 아군(조선군)과 연합하고 서울을 수복하니 전쟁 발발 1년 뒤였다. 양평을 적의 부대가 통과하게 된 동기는 임진왜란 전 일본사신이 한양에 갈 때 지나가는 길이었던 것을 군사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조정에서는 한강방어의 중요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