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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山郡) 원일면(遠一面)으로 행진 중 고초골(藁草谷)에서 (월일 미상) 일병 및 순사대(巡査 隊)와 교전, 다시 패주(敗走)하였다. 이때 패병(敗兵) 33명을 용인의 두두고마개 산 위에 집합시켜 무운(武運)이 비색함을 타이르고 한때 해산하였다. (ㅂ) 이상의 폭거 중 광주 상림(尙林) 도중에서 일진회원(一進會員) 4명, 백암시장(白岩 市場)에서 1명, 또 죽산군(竹山郡) 백암시(白岩市)에서 순사 1명, 순검(巡檢) 1명을 총살하 고, 또 죽산군에서 순검 1명을 생매장(生埋葬), 학살을 감행한 일이 있으며, 한때 정주원 (鄭周源)과 함께 횡포를 극한 바, 융희 원년 11월 10일 자택에서 수비대(守備隊)에 의하 여 체포되어 죄상을 자백하고 드디어 총살된 자이다. 이동휘(李東暉) 강화도사건(江華島事件)의 수괴 (1) 경력 원육군참령(元陸軍叅領) 강화도 진위대장(鎭衛隊長)이었다. 퇴직(退職) 후 강화도보창중학교장(普昌中學校長)으로서 자강회지부(自强會支部)의 부장 (副長)을 겸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며, 보창중학교 외에 24교(校)를 관리하여 위망(威望) 이 전도(全島)를 눌렀다. (2) 폭거 중의 행동 이(李)는 일찍이 기독교를 믿고 과격한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가졌으며, 일로전쟁(日露 戰爭) 후 일한(日韓) 관계에 싫증을 느끼던 바, 작년 이래의 시국에 대하여 일본에 대한 반감을 심심(深甚)히 하고 항상 많은 부하 회원 및 신도(信徒)에 대하여 배일사상(排日思 想)의 고취(鼓吹)에 힘써, 군대 해산을 이용하여 병정(兵丁)을 선동하고 동년(同年) 7월 30일 부하 및 일반 인민을 집합시켜 격렬한 배일연설(排日演說)을 하고, 폭거에 대한 제 반(諸般)의 계획을 가르치고, 시기가 무르익자 부하 김동수(金東秀) 외 6명이 5백여 명을 인솔하고 일을 일으키자, 자기는 경성(京城)으로 가서 형세를 방관(傍觀)하고 전혀 관계없 는 상태를 가장하고 있었으나, 사변 진정 후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정용대(鄭容大) (1) 경력 기타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산안면(山安面) 거주, 항상 부하 30~40명을 인솔하고 고양(高 陽)·교하(交河)·강화(江華)·김포(金浦) 등의 각군에 출몰하여 의병이라 일컫고 약탈을 일삼 는 화적(火賊)에 불과하여 그 경력 등이 자세하지 못하다. 한산북산(韓山北山) (1) 진위대 해산병으로서 나이 27, 부하 40~50명을 인솔하고 충청남도 온양군(溫陽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