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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하여, 이를 3대로 나누어, 그 중의 1대는 정주원(鄭周源) 자신이 인솔하고 수원군(水原郡) 수하(水下) 방면에 출동하여 겁탈(劫奪)을 함부로 하였으며, 나머지 2대는 그 부하에게 인 솔케 하여 양지(陽智)·죽산(竹山)의 경계에 배치하여 도량(跳梁)이 극단에 달하였다. (ㄹ) 11월(일자 미상). 한진(漢津)에서 배를 타고 고온포(古溫浦)에 건너가 충청도의 당 진(唐津)·풍도(豊島)·면천(沔川)·서산(瑞山)의 각군을 배회하였다. (ㅁ) 융희 2년 음력 2월. 재차(再次) 안성(安城)·양지(陽智)·죽산(竹山) 등지에 출몰하고 죽산군 능촌(陵村)에서 일본군 15명과 교전하여 매우 힘을 기울였다. (ㅂ) 융희 2년 4월(일자 미상). 양지군(陽智郡) 사동(寺洞)에서 수효 미상의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ㅅ) 융희 2년 4월(일자 미상). 용인군(龍仁郡) 요봉골(料鳳谷)에서 수효 미상의 일본군 과 교전, 부상자 1명을 냈다. (ㅇ) 융희 2년 4월 25일. 다시 충청도 당진군(唐津郡)에 건너가 그 달 회시(晦時)의 불 가(不可···不吉)함을 깨닫고 한때 부하를 해산하였다. (ㅈ) 융희 2년 7월 19일, 오전 8시경 충청도 해미군(海美郡) 적서촌(赤鼠村)에서 2척의 선박이 입항할 때에 신호(信號)를 잘 못하여 일본군에게 육박되어 달아날 길을 잃고 궁지 에 몰림으로써 스스로 수괴 정주원(鄭周源)임을 자백하고 포박당했다. 임옥여(任玉汝) 36세, 전(前) 농상공부(農商工部) 주사 경기도 양지군(陽智郡) 주동면(朱東面) 평촌(坪村) (1) 경력 : 불명 (2) 폭거(暴擧) 중의 행동 (ㄱ) 융희(隆熙) 원년(元年) 8월 중순. 경성소요(京城騷擾) 후의 국운(國運)을 분개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스스로 이천창의소(利川倡義所) 좌장(左將)으로서 횡포를 극하던 바 8월 21일 이천읍에서 일본기병(수효 미상)과 교전하여 이를 격퇴하고 그 여세를 몰아 각처에 웅비(雄飛)하기에 이르렀다. (ㄴ) 광주(廣州)·양근(陽根) 등을 배회하고 이천읍에 들러 융희 원년 8월 30일 다시 일 본병과 교전, 부하 2명의 전사(戰死)를 내고 패주(敗走)하였다. (ㄷ) 그 후 포군(砲軍) 12명을 인솔하고 광주군(廣州郡) 실촌면(實村面)에 이르러 원주 의병대장(原州義兵隊長)의 군략(軍略)을 사용하여 다시 포군 70여 명을 모집하고, 굴암 (용인군)에서 (월일 미상) 일군과 접전, 사망자 수명을 내고 둔주(遁走)하였다. (ㄹ) 융희 원년 9월 14일. 포군 1800명을 인솔하고 안성(安城)을 습격하였으나 일군에 게 격퇴당하였다. (ㅁ) 그로부터 포군 39명을 인솔하고 양근군(楊根郡)에 들러 수일 동안 체재, 죽산군(竹